2017/10/14

제가 사람의 의지를 잘 믿지 않거든요. 결심은 대체로 끝까지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많은 걸 요구하지 않고 조금씩만 요구해요. 하루에 50쪽을 읽기로 했다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되면 양을 줄여서 다시 계획해요. 이렇게 해보고 안되면 다른 식으로, 될지 모르지만 해보는 거죠. 저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굉장히 관대해요. 설계 안에서 대충하는 걸 좋아해요.  
작가가 경험으로 쓸 수 있는 소설은 한 권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또, 경험을 쓴다는 건 화자에게 확고한 딱 한 번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므로 소설가에겐 맞지 않는다고 봐요. 1인칭 화자 '나'는 인물 중의 한 명이지만 동시에 편집자로서 작가이기도 해요. 사건이 다 끝난 뒤에 그것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취재를 한 화자죠. 그래서 넓은 조망을 갖고 이 말을 지금 할까 좀 있다 할까 계속 고민하면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어릴 때부터 시간과 함께 자라는 과정을 따라가는 후일담 소설의 '나'는 예전 일을 서술하면서 당시의 내가 되어버려요. 자신은 굉장히 크고 멋있는 사람이라고 진행될 확률이 높은 거죠. 전 만약 마흔한 살인 현재의 나에 대해 쓴다고 해도 여든 살이 넘어 죽은 시점에서 마흔한 살을 돌아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회고하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음 상황에 대해 모르는 현재형의 화자는 지위가 낮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 진지한 질문을 던지긴 힘들다고 봐요. 

_<진심의 탐닉> 13쪽·25쪽, '세계의 끝, 소설가 김연수', 씨네21, 2010.  


늘 그렇듯(?) 많은 책들을 테이블에 펼쳐놓고, 하루에 몇 권씩 들추며 읽고 있다.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소위 믿고 읽거나 듣는 사람 중 하나인데, 다른 책을 찾으러 도서관에 갔다가 끌려 빌려온 책이 씨네21에 연재한 인터뷰 모임집 <진심의 탐닉>이었다.
재밌는 것은 영화 잡지에 연재한 인터뷰인데 그 대상이 배우부터 소설가, 엔터테이너, PD, 영화감독, 번역가, 과학자 등 다양하다는 것이고, 앞 부분의 몇 편의 인터뷰를 읽으니 역시나 좋은 답은 좋은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독자로서 소설가 김연수의 작품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이 짧은 인터뷰 속에 그가 소설을 포함한 글을 대하는 태도가 집약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2017/09/30

푸코는 기존의 역사학이 과거를 역사적 연속성의 선형적 질서로 재단함으로써 과거를 현재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는 이데올로기적 폭력을 행사해왔다고 비판하고 시기마다 분절된 단층을 파내려 가는 고고학을 모델로 삼아 역사적 불연속성에 주목하는 대안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푸코적 의미의 고고학적 탐구는 무엇보다 특정한 공간과 시간의 균일적이지 않은 관계망을 발굴해냄으로써 시공간이 일체가 된 과거의 원형을 '객관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는 역사학적-역사주의적 통념을 해체한다.  
꿈마루는 클럽하우스의 건축적 구조뿐만 아니라 근대건축의 근간을 이루는 텍토닉 원리를 명징하게 가시화한다. 프로이센 궁정건축가 싱켈이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듯 신고전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근(현)대건축은 분명 권력지향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기능적 합리성과 꽉 짜인 통일성의 강조는 규율과 통제라는 정치적 원리에 부합했다. 서울 컨트리클럽하우스가 구현한 모더니즘은 그 시대적 조건만큼이나 권력지향적이고 폐쇄적이었다. 꿈마루는 클럽하우스를 관통하는 텍토닉 원리를 극적으로 가시화함으로써 건축함에 대한 새로운 기억과 성찰을 고무한다. 꿈마루는 건물 그 자체가 고고학적 탐구이며 근대적 시공간질서를 파헤치는 삽자루 같은 기억이다. 기억을 통한 공간의 생산은 공간을 특정하게 자리매김하고 차별화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권력의 요구에 부합하지만, 꿈마루의 경우처럼 기억이 오히려 그러한 차별화에 물음을 던지며 비판적 성찰을 자극하게 될 때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요구와 어긋날 수밖에 없다. 권력이 생산한 모더니즘의 유토피아가 색다른 방식의 기억을 통해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_전진성,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 636쪽·637-638쪽, 천년의상상, 2015.  

2017/08/17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이성복,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2017/08/15

독일은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생산할 능력도 없다는 게 확인되었다.
일대 사기극이 시작된 것은 그때였다. 원자폭탄 경쟁에서 나찌를 누르기 위해서라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정당화는 단번에 뒷전으로 물러났으며 그와 함께 도덕적인 힘, 그로브즈가 15만 명의 남녀들 - 특히 과학자와 기술자 들 - 을 더욱 열심히 일하게 만들기 위해 불러일으킨 도덕적인 힘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의 휘하에 있던 일급 과학자들은 예상대로 "독일에 그것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가"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의문을 제기한 과학자 중에서도 제일 선두에 선 사람들은, 그들에게는 정당했던 공포로 인해 당초에 맨해튼 프로젝트를 실현시켰던 바로 그 망명 과학자들이었다. 그로브즈는 입장을 바꿔 나찌를 항복시키기 위해 원자폭탄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작업을 더욱 신속하게 진척시키라고 외쳐댔다. 그가 그렇게 설쳐댄 것은 사실 나찌가 항복하기 전에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원자폭탄을 실험해보기도 전에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날 것이 점차 분명해지자 그로브즈는 인간을 목표로 원자폭탄의 위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까봐 몹시 걱정했다. 일본이 아직 적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들이 핵무기 계획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앞지르기 위해 원자폭탄 제조가 필요하다는 식의 구실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원자폭탄의 사용이 전쟁을 단축시키고 수십만 미국인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는 제2의 대사기극이 연출되었다.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하자'는 구호는 후에 베트남 전쟁에서 부녀자, 어린이, 심지어 품속의 아기들까지도 죽인 미라이의 대학살 그리고 그와 유사한 수많은 학살사건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역질나는 공식이 된다. 그로브즈 장군은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하자'는 구호가 수십만의 일본 민간인들에 대한 살육을 정당화해준다는 논리로 그런 공식을 만들어낸 것 같다. 그로브즈 자신도 그런 구실이 일류급 거짓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원자폭탄은 일본의 항복을 확실히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원자폭탄이 실험을 거치면 즉각 일본에 대해 사용될 것이란 말이 그로브즈의 '빈틈없는' 보안망을 뚫고 새어나오자 과학자들 사이에서 곧 반발이 일었다. 독일이 더 이상 경쟁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처럼, 가장 크게 우려를 나타낸 건 맨해튼 프로젝트를 맨 처음 주장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윌프레드 버체트, <히로시마의 그늘> 141-145쪽, 표완수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5 

계속해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227쪽, 창비 2014 

김준의 사이트에서 황정은이란 이름을 몇 차례 보며, 나도 읽어봐야겠다, 국내 작가에 대해 너무 무심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지난 일주일, 황정은의 나의 첫 번째 책,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으며 큰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그런데, 비록 이야기는 나의 삶과는 동떨어진 것이지만 결코 비상상의 세계는 아닌, 바로 근처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너무나 일상적인. 그래서 은근한 애정이 남는. 그러니까 소설은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들, 우리들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사서 서재에 꽂아두고 싶었는데, 그 자리는 아무래도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 옆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의 존재를 다룬 소설 속 인물들이 3인칭이 아닌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꽤나 비중 있게 다가온다. 더군다나 엄마도, 소라와 나나는 애자로, 존재 고유의 이름으로 부른다. 다만, 지극히 내적인 고백, 즉 나기의 고백에 등장하는 소년만이 '너'로 표현될 뿐이다. 그 고백은 동성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동성애는 아직 우리 나라에서 내적인 고백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한 것일까.

2017/08/14

동네를 찾아서


용인으로의 이사는 십여 년의 서울 생활의 청산과 함께 이십대가 되며 시작된 아파트 생활에서 다시 단독주택으로 돌아가는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물론 우리 부부의 의지이자 여러 제반 여건이 고려된 결과이기도 했다.
택지지구 내 기반시설이 정비된 곳에 위치한 지금 집은 소위 말하는 땅콩 주택이어서 그리 넉넉한 공간은 아니지만 우리 부부가 갓 태어난 딸 아이와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원래 야산인 곳에 산책로를 개설한 공원이 가까이에 있고 도서관이나 호수공원도 마음만 먹으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 큰 주저 없이 택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형네 집과 무척 가까웠다. (이 동네를 우리에게 알려준 이도 다름 아닌 처형이었다.)
처음엔 미분양이었다는 동네는 단독 필지가 대략 8-10개 정도 모여 있는 클러스터가 이어져 있는 형태인데, 단독주택 붐이라도 불었는지 우리가 이사 오고 나서는 자고 일어나면 한 집 착공하는 일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동네의 빈 땅들이 하나둘 채워져 가는 사이, 어느새 아내와 내 마음 속에도 집을 짓고자 하는 욕망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 더없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집을 짓고 살기에 우리 가족에게 적합한 곳은 어디일까?
사는 데 불편하지 않고 딱히 동네에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질문에 지금 동네라는 확신은 서지 않았다. 동네가 가진 장점, 즉 쾌적함과 고요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비용 면에서도 지금 동네는 타협의 지점이 멀고도 멀었다. 게다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더 그럴싸한 변명을 하자면, 내겐 참을 수 없는 시간이 존재했다고 해야겠다.
어느 동네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왜인지 그 필요한 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대중교통의 불편함은 치명적인 단점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 시간이란 변명은 동네스러움이라는 나의 까다로운 기준에도 부합해야 했다.
동네를 찾아나서야 했다. 그 일 번지, 내 마음 속 일 번지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히로시마에서는 최초의 원자폭탄이 도시를 파괴하고 세상을 뒤흔든 지 30일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불가사의하게 그리고 끔찍하게 죽어가고 있다 ━ 하늘과 땅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그 대폭발에서도 상처를 입지 않았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기자는 원자병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히로시마는 폭격당한 도시로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증기롤러가 깔아 뭉개고 지나가서 그 도시를 완전히 없애버린 것 같다. 
히로시마에 도착해서 사방을 둘러보면 25-30평방마일 내에서는 건물 한 채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인간이 저지른 그 같은 파괴를 보면 뱃속이 휑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자는 임시 임시 경찰본부로 사용되고 있는 도심의 한 판잣집 같은 건물로 갔다. 거기서 남쪽을 바라보니 붉은 돌부스러기들만 3마일 정도 뻗쳐 있다. 수십 개로 구획지어진 도시의 거리며, 건물, 집, 공장, 인간 들을 파괴하고 원자폭판이 남긴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나는 병원에서, 폭탄이 떨어졌을 때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으나 나중에 괴상한 후유증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들의 건강은 악화됐다. 식욕이 없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져나가고 몸에는 푸른 반점이 생겼다. 그 다음에는 귀와 코와 입에서 출혈이 시작됐다. 처음에 의사들은 일반적인 쇠약증상인 것 같다고 말했다. 환자들에게 비타민 A를 주사했는데 결과는 끔찍했다. 주사바늘이 꽂힌 곳부터 살이 썩어가다가 예외없이 죽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투하한 최초의 원자폭탄이 가져온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후유증 가운데 하나이다. 거기서는 내가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특이한 냄새가 났는데, 유황 냄새와 비슷하긴 하지만 정확하게 그 냄새도 아니다. 아직도 타고 있는 불더미 옆을 지날 때나 잔해더미에서 시체들을 끌어내고 있는 곳 등 모든 것이 파괴된 지역이면 예외없이 그 특이한 냄새가 났다.  
"아침 일찍 공습경보가 있었지만 정작 나타난 것은 비행기 두 대뿐이었지요. 우리는 정찰기로만 생각하고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해제 경보가 울리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하러 나갔지요. 그후 8시 20분쯤 내가 사무실로 가려고 막 자전거에 올라탔을 때 비행기 한 대가 돌아왔어요. 그러고는 뭔가가 번개처럼 번쩍하는 동시에 뜨거운 열기와 폭풍처럼 세찬 바람이 얼굴에 확 와닿았어요. 나는 땅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내 옆에서는 집이 무너져내렸지요. 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에 옆에서 강력한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벼락 같은 폭발 소리가 났어요. 올려다보니 낙하산 모양의 거대한 검은 연기기둥이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더군요. 그 중심부에는 진홍빛 선이 있었는데, 그것이 연기기둥을 헤치고 점점 퍼져나가 마침내 전체가 빨갛게 되었어요. 그리고 히로시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나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윌프레드 버체트, <히로시마의 그늘> 63-67쪽, 표완수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5  

2017/07/08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짓고 싶었다. 현실은 당장 허락하지 않더라도, 집을 짓고 싶었다. 욕망의 무모함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은, 그 무모함이 없을 때 삶을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왜 집을 짓느냐고 물으신다면


집을 짓고 싶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렵니다.
하지만 요즘에 '-싶다'는 왜 그렇게 멀기만 한 욕망처럼 느껴질까요.
각자 생김새는 다르지만 유사한 욕망을 품고, 유사한 이야기를 나누고, 유사한 생활을 하며 유사하게 살아가는 것. 욕망마저 내 것이 아닌 남의 것과 다를 바 없어진 요즘, 어이쿠, '집을 짓는다!'니요.
남들 다 사는 아파트에서 걱정 없이, 완전하게 밀폐된 삶을 살면 될 것을.
더군다나 집을 지으면 십 년은 늙는다는데 '집을 짓는다!'니요.


건축 일기를 쓰는 일


집을 짓고 싶다는 열망만큼이나 뜨겁게 나를 자극하는 건 집 짓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방향을 못 잡고 있는 듯한 이 기분은 무엇일까(이렇게 버젓이 '건축 일기'라고 명명한 기록을 하고 있으면서도).
어제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 짓기에 관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솔토건축의 조남호 건축가가 설계하고 죽전에 지어진, 살구나무집이라고 이름 지어진 두 동의 집에 관한 책.
건축주는 소위 주거 문화 전문가라고 하는, 친구 사이인 두 명의 교수.
서두만 읽은 책에서, 저자는 책을 쓰고자 한 동기를 우리 나라에서 중산층이 집을 짓고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고 밝히고 있다(이 점, 특히 아파트 가격으로 단독 주택을 지어 살 수 있다는 건 아내가 '증명'하고 싶어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던졌던 질문, 그 근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동시에 나는 왜 기록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문 앞에 서 있다.
무엇일까? 내게 기록이란, 우리에게 집 짓기란.

17. 7. 5.

건축 일기를 시작하며


건축 일기를 쓰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록을 해야 한다."

이 때의 기록은 반드시 정제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양식을 갖춰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만족할 만한 것이 유일한 기준이라면 기준일 텐데,
비좁은 딜레마에 스스로를 가둬버려 지금껏 기록을 했으나
그 기록은 산만하게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래 결국 이렇게 새 장(場)을 마련한다.
이제 000의 기록은 이곳으로 흐르고 흘러
작은 개울이, 하천이, 강이 될 것이다.
그 강에, 몸 누일 만한 모래톱 간간이 있어주길 희망한다.

2017/04/24

'창의 경쟁'은 곧 '방패의 경쟁'을 수반했다. 어쩌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대방의 핵미사일이 내 땅에 떨어지면 수백만 명이 몰살당할 수 있다. 그래서 그걸 중간에 요격하는 방패를 갖겠다는 건 '자기 보호 본능'의 발동이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 행정부는 곧 MD의 한계를 간파했다. 'MD 구축은 안보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이 군사력을 아무리 강화시켜도 국가안보는 계속 악화된다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만든다."는 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_정욱식, <사드의 모든 것> 26쪽, 유리창, 2017


모순矛盾이라는 중국 고사가 절로 떠오른다. 말 그대로 '창과 방패'를 의미한다. 유래는 이렇다. 초나라의 한 장사꾼이 저잣거리에 창과 방패를 갖다 놓고는 "여기 이 방패는 어찌나 견고한지 제아무리 날카로운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죠."라고 말하고, "여기 이 창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꿰뚫지 못하는 방패가 없습죠."라고 했다. 그러자 한 구경꾼이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요?"라고 묻자, 장사꾼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이 '장사꾼'은 세계 최대의 무기판매국 미국의 모습과 흡사하다. 한편으로는 각종 공격용 무기들을 팔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사일은 막으라고 MD를 팔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박근혜 정부는 '구경꾼'보다도 모자라다. 사드의 성능을 묻기는커녕 '장사꾼'보다 사드의 성능을 과장하기에 바쁘다.  

_같은 책 36쪽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지 15년이 흘렀다. 이 사이에 부시의 말은 씨가 되고 있다. "대량살상무기를 장착한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이 미국까지 다다를 것"이라는 부시 행정부의 과장된 주장이 빠른 속도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MD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북한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에 대한 집착을 다시 호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반대로 북한 정권의 이들 무기에 대한 집착은 MD라는 괴물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MD와 북핵의 적대적 동반성장이다. 이러한 추세는 오늘날 더 빨라지고 있다. 사드가 대표적이다. 이 악역의 고리를 어떻게 끊느냐가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관건인 것이다.  

_같은 책 83쪽


대체로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슈'들은, 그것이 특히 안보와 관련이 있을 경우 더더욱, 논쟁의 굴레에서 다뤄지지 못 한다. 막무가내식의 주장과 상대를 자극하는 언어의 혼탁의 장일 뿐. 사드 자체로도 충분한 논쟁거리가 되지만, 그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니 저자의 말처럼 "사드라는 '나무'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MD라는 '숲'"을 보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2017/04/14

해찰은 기웃거리고 집적거리는 짓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에 딴짓을 하거나 여기저기 쏘다니지 말라고 당부할 때 쓴다. "해찰하지 말고 곧장 오너라." 그러니까 해찰은 부질없는 짓거리나 산만스런 분위기, 덜렁거리고 까부는 모양새인 것 같다. 제 갈 길 똑바로 가지 않고 갈짓자로 횡보하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만져 보고, 흥정도 했다가 말도 붙였다가 하느라 원래 어디를 가려 했는지 까먹을 지경이다. 근데, 여튼 집에 가기는 간다. 해찰은 필연적으로 집이 아닌 '언저리'에 먼저 가 닿는다. 계몽주의와 모더니즘이 떨쳐 버렸던 주변부를 지시하는, 이 족보와 어원조차 불분명한 발음은 '주변부' 같은 어휘와 호응하기도 벅차다. 주변부에서도 가장 주변부에 속하는 족속이 제 입에 '주변부' 같은 단어를 올릴 리 없는 것이다. 실은 주변부와 언저비 사이에 무엇이 가로놓여 있는가, 그것이 아무도 모르는  알려 하지 않는 ━ 우리의 문제다. 언저리는, 주변부로 호명되지조차 못하는 어느 언저리에 있다. 우리말에서 어느 언저리는 어떤 언저리이기도 하고 언저리의 어딘가이기도 하다. 곧, 언저리가 '주변부'와 다른 지점을 꼽자면, 중심부와 대결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리고 수류산방은 곧잘 말해 왔다. "우주는 언저리가 지탱한다."언저리는 가까운 근처이되, 외곽의 경계 밖을 아슬아슬 포함해야 맛이다. 한창 불고 있는 풍선의 겉껍질 같은, 외딴 산 속의 수행자 같은, 그 낱말은, 생각해 보라, 언제고 중심이 아니라 바깥을 동시에 흘끔거린다. 언저리는 주변부의 밖이다. "빅뱅의 기억을 간직한 시원의 윤곽이 지금 이 우주에서 가장 머나먼 곳에서도 더 멀리,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아나듯, "언저리는 중심으로부터, 목표로부터 수줍어하면서 애써 달아나는 움직임이다. 주제와 집단의 바깥을 밖에서 볼 수 있는 자가 언저리를 이룬다. 해찰하는 짓거리는 필경, 어른들이 싫어하는 언저리를 건드린다. 그런데, 이것은 미학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 우리가 아침저녁 매일 오가는 길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마주친다면, 그것은 아주 약간의 해찰궂은 기웃거림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똑같은 작업에서 어느날 어떠한 통찰을 얻는다면, 가장 고전적인 예술적 태도에서 새로운 섬광이 일어났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리라. 해찰의 그러한 찰나들이야말로 "解察" 즉 '풀어 살피'게 할 여지를 부여하거나, 해탈━대자유━를 엿보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이런 모든 의미 붙이기란, 또 얼마나 징글맞은가! 켄트리지 스스로 "주변적 사고"라고 말한 그 작업 방식을 우리말로 다시 "해찰"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해찰일까, 아닐까. 가장 예술적인 듯 보이는 작업이 실은 지긋지긋한 육체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별 것이 아니다. 정작 더 본질적인 데는 대개가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토요일 저녁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부부젤라'를 입에 문 행렬이 서울 삼청동 길을 지난다. 꽉꽉꽉꽉━. 꽉꽉꽉꽉━. 그 행렬은 예술로서 발견되지 못할 것이다. 전복이 일어나는 무렵에는 아무것도 전복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을 이야기하려면 스스로 주변이 아니어야 하므로, 주변을 선언하는 순간 주변이 아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그러할 것이다. 여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독선과 폭압의 역사도, 결코 세계적인 예술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이 책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다행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러나 허무에 빠지지 않고 계속 이 잔혹함을 눈물 없이 견딜, 또 한 번의 작은 명분을 얻는다. 정말 해찰이 무슨 뜻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해찰하는 어떤 상황은 가슴 아픈 것을 수반한다.  

<해찰 : 언저리의 미학> 011-015쪽, 수류산방, 2016

작년 초, 아직은 서울에 살 적에 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윌리엄 켄트리지의 전시 <윌리엄켄트리지 : 주변적 고찰>을 보았다. 한 예술가의 단독 전시임에도 그 양이 매우 방대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선이 지루하거나 걸음에 긴장을 놓칠 틈이 전혀 없을 정도로 밀도가 있었다. 무엇보다 내용이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했다. 길게 인용한 이 글은, 감동적인 그 전시를 바탕으로 수류산방에서 펴낸 책의 서문인데, 전시 못지 않게 서문 또한 감동적이어서 다소 길지만 옮겨 본다. 
운하는 뱃길 용도가 아니라 물길이라는 의미로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배가 다니기는 하지만 우선은 물을 통과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베네치아가 건설된 땅은 개펄 가운데 위치했기 때뭉네, 바다의 간만(干滿) 즉 밀물과 썰물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만약 베네치아가 지금처럼 운하에 의해서 무수히 나뉘지 않고 전체를 매립해서 통합했다면 이 도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수시로 물에 잠겨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큰비가 내리면 육지에서 급하게 흘러 들어오는 강물이 바다의 밀물과 만나면서, 그럴 때마다 도시는 물에 잠겼을 것이다. 그리하여 강의 흐름과 바닷물의 간만 관계를 면밀히 고려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운하를 설치한 결과, 마치 실핏줄이 온몸에 퍼지듯이 도시 곳곳에 운하가 지나가게 되었다.  
손세관, <베네치아> 56쪽, 열화당, 2007

어두움과 밝음의 대조, 좁은 도로에서 개방된 공공장소로의 극적인 변환 등은 베네치아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징이며, 이는 이슬람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베네치아 주민들은 주거지 주변의 폐쇄된 골목길과 개방적인 광장 사이에서 이러한 시각적 변화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도시 중심부를 거닐다 보면 전혀 새로운 시각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리저리 꺽이면서 연속하는 길을 따라 아기자기한 공간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된 상점들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활기찬 도시생활을 맞이하게 된다. 마침내 발길이 산 마르코 광장이나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스키아보니 해얀, 또는 리알토 다리에 이르면, 보행자는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열린 공간과 만나게 된다. 
같은 책 77쪽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라구나(lagoona, 석호潟湖)는 매우 특이한 환경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해안처럼 완만한 개펄로 조성된 지역이 라구나가 형성될 수 있는 적합한 지역인데, 전 세계적으로 라구나를 발견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라구나는 육지로부터는 담수가, 외해로부터는 해수가 흘러 들어오는 완만한 개펄지대로서, 우리말로 풀이한다면 '경사가 매우 완만한 개펄지대' 또는 '소택지(沼澤地)'가 적절할 것이다. 라구나는 바다와 육지 사이의 경계를 매우 애매하게 만들어, 밀물 때에는 물에 잠겨 있다가 썰물 때에는 물 위로 드러나므로 바다인지 육지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보통 땅에 굴곡이 있어서 썰물 때에는 물길이 있는 개펄을 형성하다가 밀물 때에는 수면이 넓게 펼쳐진 곳에 크고 작은 섬들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라구나는 시간에 따라 변화가 많고 다채로운 경관을 연출한다.  
같은 책 47쪽
저는 오랫 동안 외국인들에게 한국 전통 문화를 알리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 옛것에서 높은 가치와 깊은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널리 알리고 나누어 마땅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이야기했을 때 선입견 없이 알아 보고 사랑해 주는 외국인들이 있었고, 다시 찾아와 주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외국인을 상대로 하려던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만 내달리던 시대에 오히려 이 땅에서는 그런 이들을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때 너희 안의 정말 소중한 것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던 선진국의 문화인들을 만났습니다. 자기네의 실패를 교훈 삼아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고 해 준 이야기였지만, 지금 살펴보면, 우리는 그들이 잘못 갔던 길마저 똑같이 가 보고 있나 싶어 마음이 슬픕니다모시도 그 중 하나입니다.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 조용한 마을 한산에 직접 찾아가 모시를 직접 사고, 새벽 모시장을 뛰어난 그래픽과 기사로 꾸며 알린 것은 일본의 잡지사였습니다. 역사적인 문화 잡지 <긴카(銀花)>의 1998년 가을호였습니다. 우리는 그 두 해 전부터 긴 준비 기간을 가지고 차근히 공부하고 여러 장인을 만났습니다. 그 때도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그렇게까지 귀해질 줄은 몰랐습니다. 한산의 모시장은 영영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때보다 덩치가 커진 모시 전수관을 가면 지금도 전시와 시연을 관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모시가 삶과 역사에 완전히 하나 되어 있던 그 시대의 울림을 담은 자료는 남아 있지도 않고, 앞으로 도저히 만들 수도 없습니다. 
최지은, <모시한산> 9쪽, '어머니의 마음', 수류산방, 2015

이 책은 모시 한복의 멋이나 새로운 모시 공예품, 디자인을 소개하려는 의도로 만들지 않았으며, 한산 모시의 역사나 기능을 고증하려는 뜻도 없다. 또 어리석은 마음으로 굳이 덧붙이자면, 모시풀을 거두어다 입술을 헤어 가며 희고 가는 실을 토해 내며 늙어진 여자들의 이야기는 모시의 언저리라, 수류산방에서 책 제목을 "언저리의 미학"이라 한 뜻을 밝혀 둔다. 
같은 책 16쪽 

2017/04/10

(1704 광주 의재미술관) 의재를 찾아서

광주시 동구 운림동 85번지. 증심사와 약사사에 불공드리러 가는 마음들이 새벽부터 또 그 다음 새벽까지 끊이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오르다 보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 길이 바로 의재 선생이 30년을 오가신 증심사 계곡 등산로이기 때문이지요.
요즘 이 등산로에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의재 선생의 작업실이었던 춘설헌과 선생의 묘소, 옛날 차 공장이 그대로 있는 계곡 건너편에 있는 듯 없는 듯, 집인 듯 미술관인 듯, 작은 나무 상자 같은 건물이 생겼거든요. 의재 선생을 기리는 마음과 정성이 지나쳐 혹시나 산과 물이 중심인 이 계곡보다 더 잘 보이게 되면 어쩌나, 설계자도 건축주도 시공자도 조심조심 마음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10년을 계획하여 지어 낸 건물이라고 합니다. 의재 선생의 그림이 살 집인데, 그저 무등산과 그림과 차가 좋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집인데 으리으리하고 첨단 기능을 갖추면 무엇에 쓴답니까. 옛 농업 학교 건물은 약간만 개보수하여 그대로 두었고, 담도 없고 커다랗고 세련된 간판도 없는, 새 건물인지 원래 있었는지 갸우뚱하게 만드는 그런 건물입니다. 
심세중, <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242쪽, 디자인하우스, 2001

몇 해 전 눈이 가득 내린 새해 첫날, 아무 계획 없이 광주에 갔다. 그렇게나 많은 눈이 내린 줄은 미처 몰랐다. 용산에서 광주행 첫 열차에 올라 잠든 후 눈을 떴을 때, 열차는 정읍 부근을 달리고 있었는데 주위가 온통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산보다는 너른 들판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남도 땅 가운데, 사방이 고요한 풍경에 사로잡혀 열차는 광주로 다가가고 있었다. 광주역에 내려 간장게장이 나오는 백반을 먹고 광장에 나오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 1980년 5월의 광주를 알고 있다는, 그 무등산. 그곳에 오르기로 하고 관광안내소에 들러 폭설에도 개방된 등산로가 있는지 확인했다. 단 한 곳, 증심사 입구만 개방이 되어 있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바로 무등산으로 향했다. 새해 첫날이라 그런지, 증심사 입구에 내리니 등산객들로 꽤나 붐볐다. 그들 행렬을 따라 나도 무등산에 난생 처음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어서 문빈정사에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하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폭설에 아이젠도 없이 산에 오르려니 긴장이 되었지만 무등산의 등산로는 말 그대로 순했다. 큰 어려움이 없었던 기억이다. 서석대까지 올랐다. 서석대와 하얀 눈이 이루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개방된 등산로가 하나뿐이었기에 올랐던 길로 되돌아 내려왔다. 그런데, 그런데 두 번이나 스친 길가에서 의재미술관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 기억으론 그렇다. 광주에 가야했다. 의재뿐만이 아니더라도, 광주에 가야 할 이유는 많지만, 오로지 의재만으로도 광주에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2017/04/06

기형도와 조병준

오늘은 열쇠를 하나 샀다. 어쩌면 그렇게 신기하게 열리고 잠기는지. 내 일생 처음으로 열쇠를 산 것이다. 그리고 몸이 흐트러진다. 내 의식과 무의식을 잠가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불안하다. 누구를 만나고 다방에 가서 율무차를 마시고 마지못해 흡연을 하고 술을 건네고 당구를 치든지 결국은 전자오락실이다. 버스 안에 손잡이를 잡고 흔들린다. 걸어온다. 집. 빈 집, 혹은 어머니가 계신 집. 발을 닦기. 엄지 발가락부터 하나하나. 기타를 잡고 튜닝을 한다. 불안하다. 기타를 놓는다. 나의 문학은 영원히 튜닝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50쪽, 살림, 1990

이 글은 <짧은 여행의 기록>이란 제목으로 시인 사후에 출판된 산문집에 실린 편지 중 일부다. 편지라고 하지만 독자로서는 한 편의 문학처럼 대하며 읽었을 뿐인데, 며칠 전 알게 되었다. 편지의 대상, 즉 '준'이라고 시인이 칭한 그는 조병준 시인이었다. 소설가 성석제, 시인 원제길 등과 함께 기형도와 우정을 나누었다는, 그 시인. 


고등학교 때 절친한 친구인 조병준을 찾아 멀지 않은 서강대 캠퍼스를 자주 갔다. 조병준도 문학회 모임에 가끔 참석해서 준회원으로 간주되었다. 둘은 어쩌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토라진 계집애들처럼 이별을 한다고 종알거렸는데 그 덕분에 가끔 있곤 하던 이별식 석상에서 냉면은 잘 얻어먹었다. '성자를 찾아서'라는 시로 그때 우리를 감동시킨 조병준은 자신의 방에서 수백 장의 음반을 소장하고 있는 '예술의 귀족'이었다. 그의 방에서 엉덩이를 맞대고 밥 딜런이나 레너드 코헨을 들으며 시시한 연애담이나 시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한 적이 많았다. 동승동 언덕바지에 있던 그 집에서 나오는 아침이면 가까운 학림 다방에서 R. 스트라우스를 듣고 나서 205번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곤 했다. 기형도가 이름을 생략하고 '조'라고 부르던, 또는 성과 이름의 첫 자를 생략하고 '준'이라고 부르던 조병준은 지금 인도에 가 있다. 그는 기형도의 생전에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친구였고 따라서 글자로 만들 수 있는 기형도의 생각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성석제, <정거장에서의 충고> 163-164쪽, 문학과지성사, 2009

그 사실을 알고 검색을 하다가 성석제의 동생 성우제의 블로그에 실린 글을 보게 되었는데, 시인이 생전에 수다스럽고, 주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 주고, 노래도 곧잘 하였다고 하는데, 요절한 시인을 문학으로만 대했던 나로서는 적잖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오늘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오는데 갑자기 살기를 느꼈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소리를 지를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워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쉬지 않았다. 손을 들어 심장 가까이 댔다. 미약한 울림이 쓸쓸하게 내 감각을 위로했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얼굴 가득히 땀이 흘렀다. 심장마비란 이런 것일까. 나는 중계역(신도림)에 내려 콘크리트 의자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부끄럼은 잘 타는 편이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슴은 곧 터질 것 같이 팽팽한 풍선처럼 흔들렸다. 내 의식의 등유가 미친 듯이 출렁거렸다. 나는 아득히 내 아는 이들의 얼굴을 생각하고 천천히 허공을 향해 호명했다. 말을 나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흔들리는 연기처럼 수직으로 일어섰다.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57쪽, 살림, 1990

어쨌든, 조병준 시인의 글을 하나둘 찾아 읽어보려 한다. 우선 수류산방에서 펴낸 책부터. 

청명과 한식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을 한식(寒食)이라 하는데, 이날은 종묘와 능원에 제향(祭享)을 지내는 날로 절기와 관계없이 성묘를 하는 하나의 명절로 여겨왔다. 반면 청명은 1년 24절기의 하나로, 동지에서부터 한 절기씩 나누어 가다 보면 한식과 서로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상 엄연히 다른 날이다.
청명(淸明)은 봄이다. 그래서 봄에 피어나는 싹이나 꽃들이 한창인 것을 알 수 있다. 진달래와 목련은 꽃을 떼어낸 지 벌써 오래고, 개나리도 꽃을 피운다. 앵두나무의 하얀 꽃과 조팝나무의 작은 꽃들은 일시에 피어나서 우리를 기쁘게 한다. 외래종 민들레와 토종 민들레도 순서를 다투며 피어나고, 제비꽃과 꽃다지꽃, 양지꽃, 할미꽃, 그런가 하면 이른 봄에 먹었던 달래는 지천으로 하얀 꽃을 피워내니 작은 메밀밭을 연상케 한다. 바야흐로 봄의 절정에 와 있는 것이다.
원래 찬밥을 먹는 날은 한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청명이나 한식 때에는 아직 잡풀이 자라지 않아 마른 바람이 불어오므로 불이 나기 쉬운 계절이다. 따라서 나무를 심거나 묘를 손보는 사람들은 찬밥을 먹어 산불을 예방하는 때이기도 하다. 
한호철, <24절기 이야기> 92-94쪽, 지식과교양, 2016



춘분이 지나면 완연한 봄이지만 아직 아침 저녁에는 약간의 찬 기운이 남아 있다. 영상의 날씨로 확실하게 돌아섰지만 아침에는 영상 3-5도로 쌀쌀하다. 그러나 낮에는 10-15도 정도 되어 일교차가 꽤 크다. 게다가 입춘이 설날 전에 오면 봄 추위가 길어져 춘분이 지나도 꽃샘추위가 올 수 있다. 그래서 발아가 금방 되는 채소 종자를 춘분에 바로 심으면 싹이 나왔을 때 마지막 꽃샘추위에 냉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
청명 즈음해서 음력으로 중요한 날이 있다. 삼짇날이다. 음력 3월 3일은 양의 날이 겹쳐서 아주 길한 날로 여겨왔다. 작년 9월 9일 강남으로 돌아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다. 삼짇날은 원래 음력 3월 들어 첫 번째로 오는 뱀날(상사일上巳日)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날이 따뜻해 뱀도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날이라 이날 뱀을 보면 재수 좋다고 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재수 없다고 하는 데도 있다. 어쨌든 삼짇날이 되면 완연한 봄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하여 봄꽃 구경하러 나들이 가는 날이기도 하다. 진달래꽃 따다 화전 부쳐 먹고, 양지 바른 곳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쑥을 뜯어다 쑥버무리를 해먹는다. 청명이 되면 이제 안심하고 무엇이든 파종하는 날이니 화사한 봄꽃에 마음 들뜨기도 하지만 부지런히 몸을 놀려 농사에 매달려야 한다. 
안철환, <24절기와 농부의 달력> 136쪽, 139쪽, 소나무, 2011 


그런데, 
미세먼지에 신음해야 하는 청명이라니 

2017/03/22

갈수록 문제는 생산영역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졌어요. 1980년대 이후 재생산 영역의 자본화가 된 거죠. 입는 것, 먹는 것, 감정을 교환하는 것, 지식과 가치관을 전수하는 것, 사랑을 나누는 것 등 인간 삶의 사적 영역이 모두 상품화되었죠. 인간이 자율성, 의지, 감정을 갖는 사회적 존재로 되는 전 과정이 시장에 의해 장악되고, 자본은 그로부터 초과 잉여를 쌓아가는 상황, 결국 우리는 손기술이나 숙련, 지혜를 가진 생산자가 아니라 단순한 상품 소비자로 전락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소비만을 부치기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돈'만 갈망하고, '돈'을 위해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조건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지난 7~8년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자본의 재생산적 전환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니까 결국 에코페미니즘의 관점, 즉 생명, 돌봄, 상호의존성에 기반을 둔 자존과 자급의 관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이것을 대항의 무기로 삼지 않고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사적인 삶의 영역까지 자본(상품화)에 의존하게 되었는가 보았더니, 임금노동의 강도가 너무 세다는 거예요. 생산영역에서 노동착취가 심해질수록 소비에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과중한 일로 밤늦게 귀가하니까 저녁을 해 먹지 않고 외식을 하게 되잖아요? 자본주의사회의 생산 현장의 비인간화가 우리 삶을 소비주의로, 반생태적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경쟁을 붙이는 업적 중심 평가, 장시간-저임금 등의 노동조건이 개선되는 것은 생태운동의 측면에서도 불가결하다는 거예요. 자본에 의한 삶의 식민화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회복하고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내 의지에 의해서 내 삶을 내 손으로 영위하는 것,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는 게 된 것입니다. 
김현미, <녹색평론 151> 153-154쪽, '에코페미니즘-새판짜기의 비전과 실천', 2016년 11-12월

흥미롭게 읽은 좌담. 좀 더 본질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페미니즘은 자극적이고 그래서 늘 아프다. 

2017/03/21

봄과 함께, 춘분春分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동시에 낮이 밤보다 더 길어져 본격적인 봄의 시작을 알리기도 한다는, 그리고 제비가 날아온다는, 그래서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찾아온다는, 춘분. 

춘분이 되면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면서 날씨는 영하에서 영상으로 돌아선다. 그래서 춘분이 되면 겨우내 움츠렸던 풀과 벌레들이 기지개를 켠다. 우수, 경칩에서부터 벌레들은 깨어나 춘분이 되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또한 풀과 겨울을 견뎌낸 곡식과 작물들은 춘분을 기점으로 확연히 기운을 차린다. 밀, 보리의 새순이 돋고 땅속에 숨어 있던 마늘도 일제히 팡파르 불 듯이 땅속에서 새순이 고개를 쳐든다. 기죽어 있던 양파도 빳빳하게 줄기에 힘을 준다.
봄꽃들도 춘분이 지나야 일제히 만개한다. 개나리부터 목련과 진달래, 생강나무, 산수유가 꽃을 피워낸다. 따뜻한 남쪽에선 춘분 앞서 개나리가 핀다.
이런 춘분을 새해 첫날로 삼은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고대 중동 지역이다. 이 지역은 유목이 중요한 사회였기에 춘분에 힘을 받아 올라오는 목초에 의지해 살아야 했으므로 무엇보다 춘분이 중요했을 것이다.
우리도 춘분이 지나면 무엇이든 파종할 수가 있었으니 농경 사회에서도 춘분은 매우 중요한 절기다. 그런데 춘분 지나면 꼭 꽃샘추위가 찾아오므로 되도록 늦게 발아하는 씨앗들을 파종하는 게 좋다. 빨리 발아하는 것은 꽃샘추위가 지난 청명 즈음에 심는 게 좋다. 빨리 발아해서 꽃샘추위를 만나면 냉해를 입기 때문이다. 
안철환, <24절기와 농부의 달력> 94-95쪽, 소나무, 2011 

하지만 요즘은 그야말로 봄의 불청객 미세먼지 때문에 밖으로의 산책도, 안에서의 환기도 자유롭지 못하다. 안타까운 일. 그래도 몸이 반응하는 봄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길. 

2017/03/19

(1703 능동 꿈마루) 시간의 흔적 그리고 지금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1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공원 정문. 그곳을 통해 공원으로 들어서면 저기, 높다란 곳에 한눈에 보아도 웅장한 모습의 꿈마루가 늠름하게 뻗어 있다. 세월을 가늠케 하는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인 원경을 보며 걸음을 재촉하면 그만큼 더 거대해진 꿈마루 앞에 어느새 서 있게 된다. 



꿈.마.루. 세 글자가 저 웅장한 건물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생각은 육체가 그 안으로 스며들어가자마자 일순 사라진다. 왜 수류산방 심실장님이 꿈마루에 안 가보았냐고 물었는지, 몸이 먼저 알겠다는 듯 반응한다. 
분식점에서 사 간 점심을 먹기 위해 우측 경사로를 따라 피크닉가든으로 갔다. 지붕을 걷어내 기둥과 수평으로 뻗은 보만 남은 가든에는 색 바랜 바닥의 나무가 친근하게 발길을 유도하고 있었고 듬성듬성 기둥과 보 사이에 삐죽 고개를 내민 나무 몇 그루가 웰컴 투 '가든'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반쯤 볕이 드는 위치로 테이블을 옮겨 온이도 아내와 나도 식사를 했다. 먹으면서도 시선은 주위를 둘러보느라 분주했다. 세월은 속일 수 없다는, 풍부하게 골조에 남은 풍화의 흔적은 수십 년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달려들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식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아주 느리게 가든을 서성인다. 







가든 안쪽으로는 집 속의 집이라 불리는 화장실과 사무실이 보였는데, 적색 조적으로 단정하게 처리된 집들은 풍화에 젖은 가든의 골조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반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꼭 필요한 설비를 제외하고 남은 천장의 공간에는 원래의 골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칭얼대는 온이를 재울 겸 건물을 관통해 바깥으로 나가 건물 뒤편으로 갔다. 경사진 지형 탓에 건물 뒤편에 서니 시선 안에 건물 전체를 끝어당겨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육중해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조금 떨구자 방금 점심을 먹은 피크닉가든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자리에 다소 외롭게 서 있는 산수유나무엔 노란꽃이 피어 있었다. 





왼쪽 입구에 서면 캔틸레버가 되어 뻗어나온 골조가 건물이 만들어질 당시 위용을 뽐내는 듯 보이지만, 이미 그곳은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다. 원래 실내 공간임을 암시하는 듯한 철골조가 콘크리트골조와 조화를 이루고 쾌적하게 뚫려 있는 정면으로 밀려드는 도시의 원경은 쏟아지는 햇빛 탓에 전진을 방해받는다. 게다가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라니!







유연한 계단의 반복된 흐름을 따라 어느새 3층에 도착하니 상대적으로 낮은 층고가 마치 공간을 납작 업드리게 한 듯하고, 한켠에 놓인 피아노에서는 젋은 연인이 앉아 알 수 없는 연주를 이어가다 시선을 서로에게 고정시킨다. 하지만 공간의 연주가 이어진다. 아래로 뻥뚫린, 여전히 당당한 보 사이로 주말의 한가로운 행렬의 발길이 드문드문 꿈마루를 찾는다. 













나는 건물 끝에, 어느새 서 있다. 시간은 잊은 지 오래, 소음은 귀에 미처 와닿지 못하고 귓등을 스쳐 지난다. 
잠시 곁을 떠난 아내와의 재회는, 여전히 이곳이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였다면 우아하게 커피라도 마시며 서서 라운드를 바라봄직할, 건물의 상징처럼 보이는 길게 뻗은 장소에서 이뤄진다. 감동을 주체할 수 없기에, 잠시 쉬기로 한다. 따순 볕을 받으며 나는 유기농아이스크림을, 산수유가 만발한 계절에 니트에 코트 차림인 아내는 뜨거운 라떼를 마신다. 











중부지역을 휩쓴 미세먼지는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아니, 나를 잃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꿈마루를 서성인 시간은 어느새 두 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또 한 가지 더한 건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느슨하게 했다고 할까요. 꿈마루에선 모퉁이를 돌아 들 때마다 바깥이 계속 따라 들어옵니다. 바람도 안으로 들어오고, 눈이 오는 날, 비 오는 날... 꿈마루를 거쳐서 공원의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지만 여러 가지를 감각할 수 있게요. 그건 곧 이 도시 안에서, 우리가 일상 생활하면서 별 신경 쓰진 않지만 늘 느끼게 되는 것이기도 하죠. 꿈마루를 들어가서 점점 안으로 공간이 진행되면서, 계속 바뀜이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바뀌면서, 하여튼 조금 기분이 좋아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그런 공간. 어떻게 보면 꿈마루에서 가장 중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긴 빛도 있어요. 요즘 법규에 맞추느라고 엘리베이터를 하나 놓으면서 그 위 지붕을 뜯었어요.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통을 타고 빛이 천장부터 아래층까지 들어옵니다. 사실 꿈마루 안이 어둑어둑해요. 유지관리 비용을 낮추려고 조명기구도 최소로 줄였고 일체 시설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깥같죠. 여기저기서 빛이 들어와 난반사하고 바람도 통하거든요. 음, 기분이 아주 나브지 않은 다리 밑 같다고 할까요. 우리가 그 어두운 다리 밑 같은 커다란 공간을 통과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스케일이 바뀌고, 조금씩 조금씩 다른 농담의 빛이 섞여 들고, 환한 피크닉가든을 거쳐 더 밝은 북카페가 저기 위에 보입니다. 오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오히려 애들은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거 같아요. 들락날락 계속 위로 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빛의 바뀜에 대한 어린이 나름의 느낌이 있는 거 같아요.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한 거니까요. 구조물을 만들지 말고, 움직임이 일어나게 만들자, 그저 그 공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흐름들을 따라서 잘 갈 수 있도록 제공만 하자, 어느 정도 들어맞은 것 같아요. 
조성룡, <기품 있게 늙어감에 대하여, 꿈마루>, 웹진 民硏, 2015년 10월 통권 054

꿈마루에서 나와 공원을 빠져나가려 꿈마루를 등지고 걷는 동안 수차례 뒤돌아 보았다. 나였을까, 자꾸만 할 말이 있는 듯, 그래서 한 번 더 보고 싶어했던 건. 꿈마루에 쌓인 거대한 시간의 층위를 불과 두 시간여 만에 온몸으로 실캄케 해 준 조선생님의 안목과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1703 능동 꿈마루) 도시에서 공간을 기억하는 방법

세월이 쌓이면 어떤 건물이든 가치를 갖게 된다. 공간을 완성시키는 것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곧 건물과 관계 맺어온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이 스며든 공간을 지우고 헐기에 바빴다. 꿈마루의 부활은 그런 점에서 복원 과정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새로 짓는 것만이 건축이 아니라 되살리는 건축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먼 길 돌아와 우리 앞에 선 꿈마루 앞에선 이제 아이들이 뛰논다. 이 건물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지 알 리 없는 저 아이들의 웃음소리야말로 이 건물을 진정으로 완성시킨 마지막 마감재일 것이다. 
구본준, <마음을 품은 집> 76-77쪽, 서해문집, 2013 



나는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 즉 기본계획만 하기로 하고 시작했어요. 서울시에 새로운 설계를 위한 예산이 없으니 정상적 설계를 할 수 없었죠. 우선, 공공 건물은 행정 상황이나 재정 조건이 부합이 되지 않으면 진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 지으려고 했던 작은 건물의 예산에서 더 이상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큰 건물을 고쳐 쓰도록 맞출 방법을 내야 했습니다. 실은 처음 최광빈 국장에게 남기자고 제안을 했을 순간 아이디어는 이미 떠올라 있었습니다. 관리소에서 요구한 시설은, 사무실, 회의실, 통신실, 화장실 등 해서 기존 공간의 삼분지 일쯤 되었습니다. 교양관 전체 면적이 오천 평방미터쯤 되는데 필요한 것은 천사백 평방미터 정도, 예산도 딱 그만큼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더 나간 건, 지어진 다음 유지관리도 그 삼분지 일의 면적을 유지할 돈으로 할 수 있게 맞추려고 했습니다. 유지 부분이 더 중요할 수도 있고요. 공원 안의 시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역 고가 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쓸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둥이나 지붕은 있지만 바깥으로 바꿔 버린다는 것인데요. 건축이라는 것이 쓸모가 끝났을 때, 또는 기능이나 조건이 바뀌었을 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 새로 쓸 수 있는 부분만 살리고, 이것을 풍화되는 과정 속에 두자는 거죠. 
조성룡, <기품 있게 늙어감에 대하여, 꿈마루>, 웹진 民硏, 2015년 10월 통권 054호


올해 세 번째 답사 장소, 능동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우리가 도시에서 살며 어떤 공간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그 다양한 방법 중 건축이 담당하는 역할도 있을 터인데, 꿈마루는 그 역할을 아마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1702 홍성 이응노의 집) 풍경과의 말 없는 대화



홍성에 다녀왔다. 흐린 날이었고 비 소식이 있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수류산방의 도록을 미처 꼼꼼이 읽지 못한 채로 급하게, 쫓긴 듯 가게 되었다. 

홍성에 도착을 해 아내가 미리 찾아둔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으나 주일 휴무. 다시 핸들을 꺽어 빼뽀나루터 근처에 있는 참게탕집으로 가서 매운탕을 먹었다. 매운탕도 달달하니 맛이 좋았지만, 그보다 밥이 정말 맛있었다. 쌀이 토실하진 않아도 어찌나 찰지던지!
좀 쉬라며, 운전대를 잡은 아내 덕분에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내비게이션상으로 거의 다 와 가는 이응노의 집이 좀처럼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왔는지,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이에도 멀리에도 산이 있었고, 그 산은 높기도 하고 낮으면서 길기도 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무표정의 콘크리트 박스 덩어리가 눈앞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이응노의 집이었다. 



겨울이라 노랗게 익은 벼처럼 색을 바꾼 굴곡진 너른 잔디밭 위로, 야트막한 뒷산의 형태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조용한, 하나의 풍경으로서 넌지시, 말은 없지만 마치 대화를 하고 싶은 듯, 그러면서도 수줍어 주춤거리는 듯, 서 있는 이응노의 집.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 주춤거리는 품에 안기고 싶지만, 동선은 서두르지 말라고 옷깃을 잡아챈다. 얇게 흐르는 용봉천의 물이 전진에 쉼을 준다. 그리고 저기, 코르텐강판으로 단정하게 치장을 한 다리가 기왕이면 이쪽으로 돌아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동쪽으로 걸으며 시선을 세우면 저멀리 용봉산의 잘생긴 윤곽이 호젓하게 느껴지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이응노의 집을 바라보면, 제멋대로 떨어트려 놓은 듯 보이는 덩어리들이 걸음걸음마다 얼굴을 달리하며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다. 다리를 건너, 아직 피지는 못하고 피었던 흔적만 가득한 연밭을 천천히 지나며 주위의 풍경을 훑는다. 어느새 풍경의 품에 완전히 감싸인 듯 편안하다. 






좀처럼 걸음이 나아가지 않는다. 풍경에 감싸인 몸은 풍경의 사소한 변화에도 섬세하게 반응한다. 저토록 무표정 하면서도 할 말은 많은 듯한, 아니 어떤 말이라도 들어줄 듯한 덩어리들은 이미 그 자체로 풍경의 완전한 일부가 되어 있으면서도 마치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려 버리는 갈대잎처럼 걸음마다 얼굴을 달리 하니 몸은 성급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요리조리, 한참을 주변을 살피다 드디어 입장. 그토록 밖을 서성였음에도, 수차례 안면은 있어도 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왼쪽 터진 입구로 몸의 방향을 트니, 표정 없는 덩어리에 유일한 표정이라도 되는 듯 쾌적한 얼굴로 밖을 완전히 드러낸 유리 커튼월이 나타났다. 가까이엔 별동으로 된 북카페가, 멀리엔 이미 밖에서 그 호젓함을 생생하게 느낀 용봉산이 유리 커튼월 너머를 장식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뒤로 돌았다. 그리고 펼쳐지는 아늑한 풍경. 밖에서는 분명히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은 당연한 경사가 아주 완만하게, 기하학적으로 방향을 바꾸며 놓여 있었다. 그 아늑한 풍경 속 동선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경사 지붕으로 처리된 전시실은 외부에서의 소박함에 비해 높은 천정고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공간 하나 하나가 비록 크진 않아도 쾌적한 맛이 있었다. 전시를 보았다기보다 아주 만족스러운 건축적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안내 데스크에서 도록을 하나 사려고 했더니 머뭇거리면서 판매용이 아니라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게 '그냥' 준다는 거였다. 아, 맙소사, 수류산방에서 정성 들여 만든 이 아름다운 도록을! 



별동으로 이동해 라떼를 마시며 쉬었다. 전시동보다 작고 아담한 크기인 별동은 유리 커튼월도 낮게 세워져 있어 제한된 풍경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게 좀 더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밖으로 나와 뒷동산에 올라 전시동이 놓인 제각각의 모습만큼이나 서로 다른 얕은 경사의 지붕 너머로 용봉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천천히 돌며 한참을 '조성룡의 풍경'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는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그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여운 가득한, 잔잔한 감동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이곳에 자주 오고 싶다고 말을 했다. 

















2017/03/11

존 버거의 스케치북








빈 컬렉션에서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 나와, 길 건너편에 있는 온그라운드갤러리에서 존 버거의 전시를 보았다. 고요하고, 은은한, 한 편의 산문 같은 전시. 4월 7일까지. 아마도 빈 컬렉션에 한 번 더 갈 듯한데, 전시를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전시 소개: 존 버거의 스케치북

통의동 빈 컬렉션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는 보질 못했다.

같이 보면 좋은 기사: 골목 위의 건축가

2017/03/10

(1702 홍성 이응노의 집) 이응노의 집, 집 이야기

고암 이응노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홍성 땅에는 고암의 예술혼이라는 켜가 잠재해 있습니다. 선생의 생가 터에 이응노의 집을 새로이 지으면서, 이 땅에 깃든 그 켜를 찾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마을 쌍바위골 사람들이 아침저녁 지나다니는 다리를 건너 시골길을 따라 이 집에 이르게 됩니다. 숲자락에 은근히 가리운 건물은 농촌 풍경에 그저 어우러지기를 바랍니다. 오래된 지도에 나온대로 구불구불 되돌려 놓은 길을 따라 연밭과 밭두렁을 거닐 수도 있습니다. 선생의 고향집 그림대로 지은 초가 곁으로 대숲과 채마밭도, 원래 그렇게 있었던 듯 되살렸습니다. 고암 선생이 늘 보던 그 고향 풍경을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 풍경은, 우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담고 있는 고향 풍경이기도 합니다.
전시 공간은 완만한 산기슭을 따라 긴 홀에 서로 다른 네 개의 전시실이 이어진 모양입니다. 전시실 사이사이 열린 틈으로 햇빛과 풍경이 드나들며 종일 홀에 결을 드리웁니다. 기념관의 외관은 황토결이 부드럽지만, 안쪽 홀에서는 사뭇 긴장감이 느껴져 대비를 이룹니다.
이응노의 집에 이르는 길은 예술로 난 길이기 이전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근현대사의 질곡 위에 난 길이자, 그 속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 굴절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고암 이응노 선생이 그리던 고향 마을, 고암 선생이 걸어갔던 이 길을 걸어오고 지나갈 여러분의 마음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예술의 켜, 새로운 역사의 켜가 이 땅에서 다시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조성룡, <이응노의 집, 이야기> 121쪽, 수류산방, 2011

2017/03/01

수원화성의 탄생

정조는 1789년 사도세자의 묘소를 지금의 수원시 융릉으로 옮기고 명칭도 현륭원으로 바꿀 것을 명했다. 사도세자 명예회복 사업의 마지막 단계였다. 원래 이 자리는 화성읍치소가 있었던 궁벽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러나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는 명분으로 세자릉원의 이장지로 선택됐고, 근처에는 용주사를 새로 지어 능원의 원찰로 삼았다. 아울러 수원읍의 치소와 주민들을 새 장소로 이전시켜야 했다. 신도시 건설의 명분을 찾은 것이다. 신도시의 입지로 결정된 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화성역, 팔달산 아래였다.
구 수원읍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갓진 곳이라면, 신 수원읍을 동북남 3면이 툭 터진 곳으로 서울과 삼남을 잇는 길목에 위치했다. 교통이 편하면 사람이 꾀고, 사람이 많으면 상업이 발달한다. 애초부터 새 수원을 상업이 발달한 자족적 도시로 성장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한 입지 선택이었다. 18세기는 사회 각 분야의 생산력이 확대되고, 그 잉여 생산물들이 유통될 수 있는 상업이 발달하던 시기였다. 사회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폐쇄적이고 전통적인 도시를 버리고 개방적인 새로운 도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김봉렬,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1> 340-342쪽, 돌베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