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1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청사 철거

숱하게 옮겨 다닌 중앙박물관 역사에 있어 광화문 시절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조선총독부청사 철거와 운명을 같이 한 중앙박물관의 광화문 시절은 우리가 문화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문화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이 일련의 사건 자체가 우리 문화다.
조선총독부청사는 일제의 건립뿐만 아니라 우리의 철거 또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런 사안을 두고 벌일 수 있는 논쟁 또는 담론 즉, 사회적 요인, 역사적 요인, 건축적 요인, 장소적 요인 등 다양한 관점과 가치 들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논의되지 못하고 성급하게 결정이 된 건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개인적 입장이 '존치'에 좀 더 무게가 있어 이런 아쉬움(?)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할 테지만. 이 사안을 두고, 사실 다양한 관점과 지지하는 가치에 입각한 입장이 있을 수 있는데, 굳이 내 입장을 피력하자면 그건 역사적 맥락이다. 물론 역사적 맥락이라는 것도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역사는 흘러가는 것 즉,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양립할 수 없는 (경복궁의) 복원과 (조선총독부의) 존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건 나로서는 야만에 가까운 강요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일제가 우리를 억압한 시절이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역사를 더 잘 기억해야 하고, 경복궁 즉, 조선왕조 역사와 뒤엉킨 그 공간에 대해서도 그런 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저 끔찍하고 육중한 건물이 아무리 혐오스럽고 분노를 부르더라도 말이다. 아니, 두고두고 분노를 부르기에 더더욱 말이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1984년 7월 23일, 일본 군대에 의해 무력으로 침탈당한 이후, 1912년 관리권마저 조선총독부에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관리권을 강탈한 조선총독부는 즉시 경복궁 내부에 청사 신축 계획을 세워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첫해부터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던 건축물을 허물기 시작하였고, 이후 소위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라는 박람회를 열겠다는 명분으로 철거를 거듭하여 겨우 중심 건물 몇 채만을 남겨 놓았다. 1915년에 열린 공진회의 1호관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을 완전히 가리는 가설 건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왕조의 상징공간이던 경복궁을 물리적으로 해체하여 유원지로 만들었고, 그곳에서 제국주의 선전을 위한 박람회를 열었다. 일본 제국주의 상징의 완결판은 행사를 마치고 1호관 자리에 그대로 세웠던 조선총독부 청사였다. 경복궁의 위상은 1926년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청사로 인해 치명적인 훼손을 입었다. 
_국립중앙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 12쪽, 솔출판사, 2005 

출처: 나무위키
출처: 국가기록원

출처: 나무위키

구 국립중앙박물관(조선총독부 청사)은 원래 일제의 조선강점시기에 한반도 경영을 위한 총독부로 지어진 건물로, 철거 이전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10년간 쓰였다. 철거 결정은 장기적으로 경복궁 복원 계획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복원사업 중에는 경복궁 내에 새 건물을 지을 계획도 있기도 했다. 당시 건축계에서는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에 대한 문제가 근대 건축물의 보존과 역사 관점에 대한 차이로 대립되었고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다. 이유는 조선총독부가 철거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일본과 관련된 서울역사, 시청사 등 모든 건물을 철거해야 하는 원칙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지적되었다. 이러한 근대건축물 보존에 대한 입장은 서구건축양식이 국내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로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보존의 필요성과 일제강점기 건축이 한국 현대건축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연결고리를 갖는 대상이라는 점도 중요한 논점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도시계획에서 경복궁이 상징하는 의미를 생각할 때, 경복궁 배치의 완결성이 일본이 남긴 건축물로 훼손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경복궁의 제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의 철거가 마땅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첨탑은 광복절 기념행사로 철거되었으며, 10개월에 걸쳐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제2의 광복이라 할 만큼 감격스러운 날을 맞았고 광화문로에서 조선총독부 대신에 경복궁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친일 청산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까지 남아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새 집이 마련되기 정네 다시 한 번 이사를 해야만 하는 예상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철거에 대한 건축계의 논란은 근대건축물 보존의 기준과 범위, 방향에 대한 보존 원칙에 대한 과제를 남기게 되었다.  
_강권정예, <국립중앙박물관 철거에서 건립까지>, 건축문화, 2005. 11 

이제까지 한국 건축은 사회의 주된 통치 세력으로서 정부권력과 긴밀한 결탁관계를 맺어왔다. 정부 주도하에 건축가들에 의해 설계되고 지어진 대형 건축물들은 대부분 민족 전통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담아 권위적 외관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국 건축의 문제가 건축가의 창조성에 주로 관련된 것이었다면, 총독부청사의 철거는 건축물의 파괴 역시 정치적 이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청사의 철거장면을 지켜본 건축인들은 건물의 돔이 잘려져 나가는 장면, 그리고 건축물이 마치 역사의 죄인처럼 취급되는 상황에서 정치와 건축의 관계의 이면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 근대화의 역사적 트라우마로 인해 일제에 의한 근대 건축물의 경우 그 의미가 쉽게 곡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한국 건축계는 건축의 역사에 대한 주체적인 기준을 마련할 필요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_박혜인·김현섭, <조선총독부 철거문제를 통해 본 한국 건축계의 의식변화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20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