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2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왜 용산인가?

건립부지는 일본 군대가 주둔하면서 군사기지가 된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계속 미국의 군사기지로 이용되던 곳이다. 1992년 미군기지 남쪽에 있던 골프장이 우리에게 우선 반환되어 '용산가족공원'이 되었고, 앞으로 전체 미군기지의 반환을 전제로 이곳을 새 박물관의 건립부지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열 곳의 후보지 가운데 선택된 용산가족공원은 남산의 녹지 공간과 한강의 수변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서울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아울러 용산가족공원의 북쪽에 위치하는 미군기지가 옮겨지면 서울에서 가장 넓은 땅이 확보되므로, 앞으로 공원과 뮤지엄 콤플렉스 등의 복합문화단지를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선정 이유가 되었다. 
_국립중앙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 14쪽, 솔출판사, 2005

그러나 용산 지역이 박물관의 부지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논란 또한 빈번하였다. 용산 지역은 갯벌과 모래가 섞인 저지대 퇴적층으로 침수 가능성이 큰 부지였기 때문이다. 침수되었을 때도 가장 먼저 잠기고 제일 늦게 물이 빠지는 습지에다가 대규모 홍수가 나 한강 범람 시 침수될 가능성도 높은 지역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건축물이 건조되기에 불리한 유리하지 않은 지반으로 박물관 공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우려로 이어졌다. 특히 유물이 보존되는 수장고에 대한 우려가 제일 컸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공사가 시작되면서 자체 대지조사를 새롭게 진행하였고 부지의 지질 특성에 따라 기초방식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지반을 평균 3미터 정도 성토하여 지반고를 14미터 이상 높이는 공사가 추가되었으며, 200년 주기의 대홍수에도 안전하도록 대지 레벨이 조정되었다. 그러면서 공사는 예정된 일정보다 늦춰지게 되었다.
박물관 부지 논란에 대한 원인으로 대지 특성 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부지는 미군이 주둔해 있는 군사지역으로 대지조사와 지질테스트가 시도될 만큼 현장 접근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박물관 건립계획이 나오면서도 대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고 시공자 측은 전한다. 미군 역시도 용산 지역에서는 특별한 군사시설을 건축하는 등의 건축행위가 없었던 곳으로, 골프연습장과 헬기이착륙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정도였다.
이러한 특수성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개관이 힘들지 않느냐는 걱정을 만들기도 했다. 박물관 부지 내 일부(현재 박물관 진입로쪽 광장 일부)가 주한미군의 헬기장이었기 때문이다. 헬기의 이착륙으로 인한 진동이 유물 보존과 박물관 관람 환경에 지장을 주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에 외교부는 박물관 이전을 지속적으로 미군측에 요청하였고,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을 4개월 여 앞둔 6월에 이전하였다. 그것은 지난 1995년 1월 요청한 이래 7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현재 이전된 헬기장의 위치는 박물관에서 북서쪽으로 500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소음과 진동으로부터 지장이 없다는 최소거리 400미터를 겨우 넘고 있다.
용산이라는 땅의 특수성은 더 오랜 과거에서부터 시작된다. 과거 청나라와 일본, 현재는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곳이지만, 향후 국립중앙박물관이 활성화되기 위해서 주변 지역이 뮤지움 콤플렉스나 시민공원 등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시민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볼 때 관련 행정당국 간의 협의와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_강권정예, <국립중앙박물관 철거에서 건립까지>, 건축문화, 2005. 11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국제현상설계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상설계지침은 박물관의 시대적인 함의와 논의의 지점을 보여주는데, 바로 한국성에 대한 요구다. 즉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문화의 장 속에 합류' 시키며, '한국 및 한국예술의 고유성에 대한 상징물로서 전시관의 개념을 재정립'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상당히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이 프로젝트는 단일 매스로 풀어낸 정림건축의 안을 당선안으로 결정하면서, 혁신적인 실험보다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박길룡 교수는 이에 대해 "합리성을 선택하는 보수성에 기울어졌다"고 평가한다. 당선작이 모더니즘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합리적 근대성과 지역적 낭만성을 엮고 있으며, "내부의 명쾌한 기능처리가 강점"이었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 나라의 공공시설로서 그 표상이 읽히도록 한 점을 높게 평가"한 심사평은 당시 한국의 상황과 관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일 것이다. 전진삼 씨는 이에 대해 "정치적 디자인 수완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문화시설로서 박물관이 아니라, 공공시설로서 그 표상이 읽히는 한국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선택'이었다.
동작대교를 통해 한강을 건너오는 도로는 용산에 이르러 미군기지에 막혀 우회하게 된다. 현상설계지침에는 향후를 대비해 계획되어 있는 직선도로 조건이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도시계획시설로 입안된 도로는 곧장 부지 옆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결정났으며, 그 결과 건물의 길이는 서편으로 15미터 가량 이동하면서 축소되었다. 그와 함께 사각형이었던 로툰다영역도 원형으로 바뀌었다. 또한 모든 물길을 거울못에 집합시킴으로써 낮은 지대의 단점을 보완하려던 개념은 근본적으로 침수가 되지 않는 상한선으로 성토하자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결국 건물을 3미터 이상 높아졌고, 거울못은 축소되었으며, 긴 매스와 배치상에서 대응하던 주차장은 건물의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작은 변화는 결과적으로 대형 매스의 부자연스러움을 초래한 원인이기도 하다.  
_임진영, <국립중앙박물관, 10년의 기록>, 공간, 2005. 11

다음은 공간(2005. 11)에 실린 박승홍 인터뷰

(정치적 디자인 수완이 돋보였다는 지적에 대해)
권위주의적 표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전혀 생각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한 적은 없다. 이 건물이 가진 스케일로 권위적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여러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 박물관 내부의 프로그램도 공간의 권위적 성격을 완화하고 있다.
공공건물로 인식되는 특성은 일부러 감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조건과 환경으로부터, 그리고 개념으로부터 타당하게 도출된 접근이라면 굳이 그것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초기 개념에 대해)
벽, 성벽에 관한 생각을 했다. 벽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보편적인 시간 개념, 초월의 개념, 영원함을 담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정서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또 그 지역의 특성상, 다른 것은 못해도 꼭 한 가지 바랐던 것은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땅에 깊이 박혀 있는 우직한 건물이 되길 원했다. 세련된 멋 없이, 우직하게 박혀 있는 건물 말이다. 

(심사위원들이 못을 없애려 한 이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물과 물이 근접해서는 안 된다는 발상이었던 것 같다. 물이 건물의 아래쪽에 있음을 설명해도 설득이 힘들었다. 또 못의 형태가 한국적인가, 아닌가에서 한국의 못에는 가운데 구름다리가 지나간다. 동선이 너무 돌아간다는 이야기까지 지적되었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을 그대로 옮겨놓지 않겠다는 것이 이미 이 프로젝트의 전제였다. 형태를 따르는 것은 무의미하며, 경험이나 질감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는데도 그런 논의가 나왔다. 또 직선 진입을 고려해보자고 해서 이를 설득하기 위해 시뮬레이션까지 만들었다. 예전 관공서는 대칭 구성에 가운데로 진입하는 관료적인 형태가 많은데, 이런 큰 건물의 경우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면 중압감을 더 주게 된다. 때문에 오히려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주변을 보고 건물의 일부를 보고, 또 멀리서 봤던 건물의 모습을 바로 가까이에서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건물과 사람의 상호교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건물 길이 축소에 대해)
20미터 축소되었다. 그 20미터를 줄이느라, 400미터 퀄리티가 줄어드는 셈이다. 길이를 줄이기 위해 로비 형태가 바뀌었고, 못의 규모도 크게 줄어든 상태다. 그 외에 조경도 조금 더 자연적인 느낌의 구릉이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전체적인 큰 틀은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완성된 건축물의 설득력에 대해)
초기 계획보다 건물이 올라갔다. 이런 규모에는 1미터 높이도 상당히 차이가 크다. 지금 부지는 그 일대에서도 가장 낮은 곳이어서 지침에도 침수지역에 대한 고려가 언급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지 선정 초기에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어쨌든 주어진 부지에서 고안한 것이 바로 못이고, 건물과 수장고를 이중벽으로 조성하는 것이었다. 즉 침수시 그 물을 못으로 다 모아내는 개념이었다. 만약 정말 불가항력의 엄청난 비가 온다면, 물을 빼내고 유물을 옮길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침수를 고려한 설계 아이디어다.
그런데 그래도 계속 문제가 되니까 결국 건물을 올리자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그 큰 매스가 높아지니 중압감은 상당히 더해졌다. 더구나 문제는 뭔가. 건물을 올린 만큼 저층부에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그곳에 주차장을 넣자고 해서 변경된 것이다. 하지만 주차장 역시 전체 배치 개념 중 한 요소였다. 전체 건물의 길이와 주차장의 길이를 서로 같게 하고, 일부러 전면에 배치해서 서로 교류한다는 설정이었다. 사람들이 주차장에 도착해서 연못을 돌아 접근하는 것이 개념이었다. 그래서 중압감이 생길 수 있는 건물의 규모에 적응하고 친근해지게끔 하는 아이디어라서 주차장은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주차장을 지하에 두면 사람들은 주차장에서 건물 안으로 바로 올라서게 된다. 물론 기능적으로 합당한 결론이지만, 그것이 옮겨감으로써 전체적인 체험구조가 상당히 뒤바뀌었다. 

(미군 이전 이후 가능성)
그 부분에서 열린마당이 중요하다. 큰 의미에서 남북을 통과한다는 것이지만 말장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산을 바라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미군기지가 개방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북쪽에서 접근할 수 있다. 북측 입면이 정면성이 중요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2017/01/21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청사 철거

숱하게 옮겨 다닌 중앙박물관 역사에 있어 광화문 시절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조선총독부청사 철거와 운명을 같이 한 중앙박물관의 광화문 시절은 우리가 문화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문화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이 일련의 사건 자체가 우리 문화다.
조선총독부청사는 일제의 건립뿐만 아니라 우리의 철거 또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런 사안을 두고 벌일 수 있는 논쟁 또는 담론 즉, 사회적 요인, 역사적 요인, 건축적 요인, 장소적 요인 등 다양한 관점과 가치 들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논의되지 못하고 성급하게 결정이 된 건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개인적 입장이 '존치'에 좀 더 무게가 있어 이런 아쉬움(?)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할 테지만. 이 사안을 두고, 사실 다양한 관점과 지지하는 가치에 입각한 입장이 있을 수 있는데, 굳이 내 입장을 피력하자면 그건 역사적 맥락이다. 물론 역사적 맥락이라는 것도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역사는 흘러가는 것 즉,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양립할 수 없는 (경복궁의) 복원과 (조선총독부의) 존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건 나로서는 야만에 가까운 강요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일제가 우리를 억압한 시절이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역사를 더 잘 기억해야 하고, 경복궁 즉, 조선왕조 역사와 뒤엉킨 그 공간에 대해서도 그런 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저 끔찍하고 육중한 건물이 아무리 혐오스럽고 분노를 부르더라도 말이다. 아니, 두고두고 분노를 부르기에 더더욱 말이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1984년 7월 23일, 일본 군대에 의해 무력으로 침탈당한 이후, 1912년 관리권마저 조선총독부에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관리권을 강탈한 조선총독부는 즉시 경복궁 내부에 청사 신축 계획을 세워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첫해부터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던 건축물을 허물기 시작하였고, 이후 소위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라는 박람회를 열겠다는 명분으로 철거를 거듭하여 겨우 중심 건물 몇 채만을 남겨 놓았다. 1915년에 열린 공진회의 1호관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을 완전히 가리는 가설 건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왕조의 상징공간이던 경복궁을 물리적으로 해체하여 유원지로 만들었고, 그곳에서 제국주의 선전을 위한 박람회를 열었다. 일본 제국주의 상징의 완결판은 행사를 마치고 1호관 자리에 그대로 세웠던 조선총독부 청사였다. 경복궁의 위상은 1926년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청사로 인해 치명적인 훼손을 입었다. 
_국립중앙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 12쪽, 솔출판사, 2005 

출처: 나무위키
출처: 국가기록원

출처: 나무위키

구 국립중앙박물관(조선총독부 청사)은 원래 일제의 조선강점시기에 한반도 경영을 위한 총독부로 지어진 건물로, 철거 이전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10년간 쓰였다. 철거 결정은 장기적으로 경복궁 복원 계획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복원사업 중에는 경복궁 내에 새 건물을 지을 계획도 있기도 했다. 당시 건축계에서는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에 대한 문제가 근대 건축물의 보존과 역사 관점에 대한 차이로 대립되었고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다. 이유는 조선총독부가 철거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일본과 관련된 서울역사, 시청사 등 모든 건물을 철거해야 하는 원칙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지적되었다. 이러한 근대건축물 보존에 대한 입장은 서구건축양식이 국내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로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보존의 필요성과 일제강점기 건축이 한국 현대건축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연결고리를 갖는 대상이라는 점도 중요한 논점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도시계획에서 경복궁이 상징하는 의미를 생각할 때, 경복궁 배치의 완결성이 일본이 남긴 건축물로 훼손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경복궁의 제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의 철거가 마땅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첨탑은 광복절 기념행사로 철거되었으며, 10개월에 걸쳐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제2의 광복이라 할 만큼 감격스러운 날을 맞았고 광화문로에서 조선총독부 대신에 경복궁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친일 청산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까지 남아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새 집이 마련되기 정네 다시 한 번 이사를 해야만 하는 예상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철거에 대한 건축계의 논란은 근대건축물 보존의 기준과 범위, 방향에 대한 보존 원칙에 대한 과제를 남기게 되었다.  
_강권정예, <국립중앙박물관 철거에서 건립까지>, 건축문화, 2005. 11 

이제까지 한국 건축은 사회의 주된 통치 세력으로서 정부권력과 긴밀한 결탁관계를 맺어왔다. 정부 주도하에 건축가들에 의해 설계되고 지어진 대형 건축물들은 대부분 민족 전통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담아 권위적 외관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국 건축의 문제가 건축가의 창조성에 주로 관련된 것이었다면, 총독부청사의 철거는 건축물의 파괴 역시 정치적 이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청사의 철거장면을 지켜본 건축인들은 건물의 돔이 잘려져 나가는 장면, 그리고 건축물이 마치 역사의 죄인처럼 취급되는 상황에서 정치와 건축의 관계의 이면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 근대화의 역사적 트라우마로 인해 일제에 의한 근대 건축물의 경우 그 의미가 쉽게 곡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한국 건축계는 건축의 역사에 대한 주체적인 기준을 마련할 필요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_박혜인·김현섭, <조선총독부 철거문제를 통해 본 한국 건축계의 의식변화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2010. 10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연혁


  • 1909. 11. 창경궁 제실박물관 개관
  • 1945. 12. 국립박물관 개관(조선총독부박물관 인수)  *1915. 12. 총독부박물관 개관
  • 1950.  4. 국립민속박물관 남산분관 통합
  • 1950. 12. 한국전쟁으로 소장품 부산 임시 이전
  • 1953.  8. 부산에서 경복궁 내 청사로 복귀
  • 1954.  1. 남산분관으로 이전 개관 
  • 1955.  6. 남산분관에서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 개관
  • 1969.  5. 덕수궁미술관 통합
  • 1972.  7. 국립박물관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 변경
  • 1972.  8. 경복궁으로 신축 이전 개관(현 국립민속박물관)
  • 1986.  8.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구 중앙청)
  • 1993. 10. 국립중앙박물관 신축계획 확정
  • 1994. 12. 새 국립중앙박물관 국제설계공모
  • 1995.  8. 광복 50주년, 중앙청 철거 및 국립중앙박물관 임시 이전 확정
  • 1995. 10. 새 국립중앙박물관 국제설계공모 당선안 결정 (정림건축 박승홍)
  • 1996. 12.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현 국립고궁박물관)
  • 1997. 10.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기공식
  • 2005. 10.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이전 개관

아, 이 엄청나게 굴곡진 역사 

(1701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건축 개요


  • 위치: 서울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 설계: 박승홍(정림건축)
  • 시공: 동부, 대우, 현대, LG, SK
  • 수상: 서울특별시 건축상 대상, 2006
  • 대지면적: 307227.83㎡
  • 건축면적: 49117.38㎡
  • 건폐율: 15.99%
  • 연면적: 137088.95㎡
  • 용적율: 38.03%
  • 층수: 지상 6, 지하 1
  • 최고높이: 43.08m
  • 구조: 철골철근콘크리트
  • 외부마감: 외벽 - THK50화강석 잔다듬, THK3알루미늄시트, 지붕 - 콘크리트평슬래브 위 시트방수, 창호 - THK24로이복층유리
  • 조경면적: 192995㎡
  • 조경: 서안조경
  • 설계기간: 1995. 12 ~ 1997. 6
  • 공사기간: 1997. 10 ~ 2004. 7

2017/01/20

잠 없는 밤. 벌써 사흘째나 이어지는 중이다. 잠이 쉽게 들지만, 한 시간 후쯤, 마치 머리를 잘못된 구멍에 갖다 뉜 것처럼 잠이 깨버린다. (···) 이제부터 대략 새벽 5시까지, 밤새도록, 비록 잠이 든다 해도 너무나 강력한 꿈에 사로잡힌 나머지 동시에 의식이 깨어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 형식적으로야 내 육신과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동안 꿈으로 나 자신을 쉴 새 없이 두들겨대야만 하는 것이다. 5시 무렵, 최후의 잠 한 조각까지도 모두 소진되어 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오직 꿈을 꿀 뿐이다. 그것은 깨어 있는 것보다 더욱 힘들다. 나는 밤새도록, 건강한 사람이라면 잠들기 직전에 잠시 느끼는 그런 혼몽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꿈들이 내 주변에 모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꿈들을 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쓴다.  
프란츠 카프카, <꿈> 27쪽, 배수아 옮김, 워크룸, 2014

잠 못 이루는 밤. 일련의 이런 밤들 가운데 벌써 세 번째 밤이다. 나는 잠은 잘 들기는 하지만 머리를 잘못된 구멍에 눕혀놓기라도 한 것처럼 한 시간 뒤에는 깨어난다. 나는 완전히 깨어나, 전혀 잠들지 않았거나 아니면 단지 선잠을 잤다는 느낌을 갖는다. 또 잠을 잘 일이 새로이 내게 놓여 있고, 잠은 나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제부터 새벽 5시경까지 밤새 내내 자기는 잔다. 나는 자고 있기는 하지만, 많은 꿈들로 동시에 깨어 있는 그런 상태에 있다. 나 스스로는 꿈들과 맞붙어 싸워야만 하는 동안 내 곁에서는 내가 모양새로는 잠을 자고 있다. 5시경에 잠의 마지막 흔적도 다 써버렸고, 나는 깨어 있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을 꿈꾸고 있을 뿐이다. 요컨데 나는 건강한 사람이 진짜 잠이 들기 전에 한순간 처해 있을 그런 상태로 밤 전체를 보내는 것이다. 내가 깨어나면 숱한 꿈들이 내 주위에 모여 있지만, 나는 이 꿈들을 곰곰이 생각지 않으려고 한다.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일기> 44-45쪽, 이유선·장혜순·오순희·목승숙 옮김, 솔출판사, 2017 

솔출판사에서 출간해온 카프카 전집이, 완간되지 못한 채 영원히 멈춰있는 듯싶더니, <카프카의 일기>와 <밀레나에게 쓴 편지>의 출간으로 드디어 완성됐다. 사실 거의 기대를 져버리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무척이나 반갑다. 보통 전집이라고 하면, 디자인이나 판형을 통일하고 번역도 한두 사람이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카프카 전집은 그렇지 않다. 더군다나 막판에 나온 일기와 편지는 각각 전집 6, 8권인데 기존 판형과도 달라 책장에 나란히 꽂으면 난감할 정도로 어색하다. 물론 이런 불평조차 전집이 완간됐으니 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반대로 전집이기에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다음은 솔출판사 <카프카 전집> 목록

  1. <변신>(단편전집), 이주동 옮김, 2003(개정판, 1판은 1997)
  2. <꿈 같은 삶의 기록>(잠언과 미완성 작품집), 이주동 옮김, 2004
  3. <소송>(장편소설), 이주동 옮김, 2006
  4. <실종자>(장편소설), 한석종 옮김, 2003
  5. <성>(장편소설), 오용록 옮김, 2000
  6. <카프카의 일기>, 이유선·장혜순·오순희·목승숙 옮김, 2017
  7.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카프카의 편지 1900~1924), 서용좌 옮김, 2004
  8. <밀레나에게 쓴 편지>, 오화영 옮김, 2017
  9. <카프카의 편지>(약혼녀 펠리체 바우어에게), 변난수·권세훈 옮김, 2002
  10. <카프카의 엽서>(누이에게), 편영수 옮김,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