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8

먼저 온 미래 (장강명, 2025)

"그때까지 정석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알파고  때문에 그 틀이 깨졌고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어요. '바둑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정답이 정답이 아니게  됐다, 이제 마음대로 둬도 된다' 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다시 '알파고 정석'이 생겼어요. 그때 자유라는 건 틀이 무너질 때 생기는 잠깐의 해방이었던 거죠. 지금은, 저는 되게 슬퍼요. 지금 기사들이나 학생들이 두는 바둑은 저희가 배운 바둑이 아니에요. 전혀 다른 바둑이에요. 에전에는 정석이 있어도 그걸 비틀 수가 있었어요. 그러면 그때부터 또 난리가 나죠. 살짝 비튼 것에 대한 연구가 막 시작되고, 또 다른 변화가 생겨요. 약간 개성 있는 기사가 정석을 비틀면 거기서 변화들이 조금씩 생기고, 정석들이 조금씩 변화했거든요. 예전에 우리가 만들었던 정석은 이렇게 여러 기사가 많은 걸 경험하고 연구하면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비틀 수가 없어요. AI가 정해주니까. AI를 사용하면 이길 확률이 바로 뜨니까 '이 수는 아웃' 이렇게 돼요. 전보다 더 견고한 성에 답답하게 갇혀버린 느낌이에요. 바둑이 싫어진 건 아니고, 바둑을 좀 잃어버린 기분이에요.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을 뺏겨버린 느낌." (58)

 

"제가 어려서 바둑을 배울 때 바둑은 평생 공부를 해도 끝에 다다를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프로기사 수준이 되면 누군가에게 배운다기보다는 스스로 갈고닦고 혼자 수련하는 거죠. 그래서 아무도 답을 모르는 것을 내가 공부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런 게 없어졌어요. 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연구하던 것과 AI가 정답을 알려주는 상태에서 연구하는 건 다르죠." (59) 


엊그제 배송된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있다. 챗GPT로 대표되는 AI시대의 - 우리가 아직 완전히 실감한다고 하기엔 섣부르지만 - 예고편은 사실상 '이세돌 vs 알파고' 간 바둑 대결이 아니었을까. 시간을 곱씹어보니 무려 9년 전. 바둑을 두지 않고 둘 줄도 모르지만, 이 책은 바둑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AI가 바둑판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에 대한 르포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고 바둑 AI프로그램이 보급되면서 변화가 스며들고 있는 바둑계의 풍경을 여러 바둑 기사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약간 자조하듯 읊조린다. 비단 바둑계에서만 그러하진 않을 것,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