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1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2023)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장화 뒤꿈치로 잔디를 뜯고, 차를 몰고 가기 전에 지붕을 철썩 때리고, 침을 뱉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기를 좋아한다. 신경 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12-13)

아빠는 진짜 그러면 좋겠다 싶은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17)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27)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28)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69-70)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아저씨가 말한다. "오늘 밤 너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만, 에드나에게 나쁜 뜻은 없었어. 사람이 너무 좋거든, 에드나는. 남한테서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가끔은 다른 사람을 믿으면서도 실망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지. 하지만 가끔은 실망하고." 
아저씨가 웃는다. 이상하고 슬픈 웃음소리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72-73) 

대단히 바쁘지도 그렇다고 아무 일 하지 않고 보내지도 않지만, 올해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있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은 슬프지만, 짬을 내서 책을 -- 이를 테면 고다르의 인터뷰라든가, 서리북에 실린 서평 따위 -- 조각내 읽을 때면 옅은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다음 주 책 모임 때문에 키건의 책을 처음으로 읽게 되었는데 비슷한 분량의 책이 한 권 더 있어 이 책 '맡겨진 소녀(foster)부터 붙잡고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우리가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을 잘 참아내 침묵을 지킨 후에 찾아오는 다행스런 여운 같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