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1

아빠가 일하던 전문대학은 우리가 살던 작은 마을의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학 캠퍼스를 포함해도 우리 마을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6~7킬로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오빠와 나는 부모님과 함께 제일 번화가인 메인 스트리트의 남쪽에 있는 커다란 벽돌집에 살았다. 아빠가 1920년대에 자란 곳에서 서쪽으로 네 블록, 엄마가 1930년대에 자란 곳에서 동쪽으로 여덟 블록 떨어진 곳이자, 미니애폴리스에서 160킬로미터 남쪽, 아오와주 경계선에서 8킬로미터 북쪽으로 떨어진 곳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태어날 때 나를 받아준 바로 그 의사 선생님이 때때로 면봉으로 목에서 점액을 채취해 인후염 검사를 하는 병원도 지나고, 치약색의 파란 급수탑도 지났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그 급수탑을 지나면, 한때 아빠의 학생이던 사람들이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고등학교가 나왔다. 장로교 교회 건물의 처마 밑을 지날 때면 아빠는 고드름을 딸 수 있도록 나를 안아 올려줬다. 그 교회는 아빠, 엄마가 1949년 주일 학교 소풍에서 처음으로 데이트하고, 1953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1969년에 내가 세례를 받고, 일요일마다 온 가족이 예외 없이 예배드리는 곳이었다. 나는 하키 퍽을 차듯 고드름을 차면서 걸었다. 고드름은 길 양쪽으로 쓸어서 쌓아놓은 눈벽에 부딪히고 튀어나가곤 해서 열 걸음에 한 번 정도 차면 됐다. 
사람들이 직접 삽질을 해서 눈을 치워놓은 인도를 따라 걷다 보면 단열처리가 잘된 집들이 보였다. 그 안에는 틀림없이 아빠와 나처럼 조용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길가의 집들에는 거의 한 집도 빠짐없이 우리가 아는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아기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엄마, 아빠가 어릴 적부터 같이 놀았던 아줌마, 아저씨들의 아들딸들과 함께 자라났다. 우리가 서로 알지 못했을 때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관계이지만 모두들 과묵함을 타고났기에 서로를 아주 잘 알지는 못했다. 열일곱 살이 돼서 대학을 간 후에야 나는 세상이 대부분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_호프 자런, <랩 걸Lap Girl> 21~22쪽, 김희정 옮김, 알마출판사, 2017.

2020/07/23

우선 창조라는 행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창조라고 하면 다 좋은 거냐는 거죠. 모든 창조가 좋은 작품으로 연결되지는 않잖아요. 가령 별 볼 일 없는 창조도 있는 거죠. 창조라는 것이 대단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창조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들 중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 번역은 창조이냐 아니냐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 질문에는 논란이 있죠. 없던 걸 만드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가령 언어는 성긴 그물 같은 거잖아요. 언어는 사진이 아니니까. 작가가 파란 하늘에 초록색 풀밭이 있다고 썼다면, 그것이 얼마나 파란색이고 얼마나 초록색인지, 풀이 얼마나 조밀하게 나 있는지 얼마나 높은지 누구도 모르죠. 언어는 자체로 완전하지 않아요. 따라서 몇 마디 말을 가지고 우리는 어떤 부분들을 그려내면서, 상상하면서 읽게 되죠. 예컨대 이처럼 성긴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읽는 행위 자체가 창조적 행위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번역 역시 창조적 행위라고 할 수 있겠죠. 오리지널을 창조하느냐, 그에 파생된 창조 행위를 하느냐는 물론 다른 범주이지만. 그렇다고 이 둘을 무조건적인 상하관계로 배치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에요. 창조 행위의 결과로서 가치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_정영목, <Axt no.031 2020. 07/08>

2020/06/19

산책의 기록

매일 오전,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오면 신발을 갈아 신고 산책을 나선다. 한 시간 남짓.

20.06.19 화서문에서 서장대 오르는 성곽길

성곽 너머, 저 멀리 건설 중인 아파트는 케이티엔지 연초장이 있던 자리다. 화서역과 정자시장 사이. 저 아파트 모델 하우스가 세워지고, 주말이면 사람들이 줄지어 그곳을 찾았던. 그 맞은편 아파트에서 꼬박 1년을 살았다. 


20.06.19 서북각루 아래에서 바라본 영화동 일대

여길 지날 때면 한 번쯤 멈춰서 바라보게 된다. 저 멀리 광교산과 영화동, 숙지산을 완전히 가리는 벽산아파트를. 특히 오늘처럼 날씨가 좋을 때면 더 오래. 


20.06.18 장안경로당 옆 쉼터

쉼터에 저 볼라드가 있기 전엔 거의 늘 쉼터 통로를 가로막은 주차가 있었다. 애들 데리고 다닐 때마다 불편해서 민원을 넣었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볼라드가 박혔다. 경로당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코너 집도 내부가 헐리고 있다. 담장도 곧 철거될 운명. 동네의 변화는 무섭게 진행 중. 한 방향으로만.




4미터였던 골목이 우리 집 건축과 동시에 1미터가 더 확보되면서 예상대로 골목은 주차장이 되었다. 기본 3대. 어떤 날에는 4대, 5대까지도. 언젠가부터 꼬깔콘도 등장했다. 자꾸 늘어나는 카페들 때문에 가뜩이나 주차에 어려움이 있었던 주민들이 다소나마 안정적으로 주차를 하는 거야 무슨 문제가 있겠나. 그렇지만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고,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부서진 조각은 사라지고 건네지는 말은 없으니, 기운이 빠진다.


20.06.17 그래도 산책은 계속된다



20.06.16 장안공원 밤산책

작년에 이사를 오고 이맘 때 거의 매일 산책을 했다. 이제는 저녁을 먹고나면 온이가 먼저 산책을 가자고 한다. 


20.06.16 서북각루

온이의 요청에 작년에는 산책을 나서면 가곤 했던 서북각루. 


20.06.15 광장에서의 노을

저녁을 먹으러 광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노을이 자꾸만 발길을 멈추게 한다. 


20.06.15 용도 밖에서 보는 서남암문

2020/06/03

더위에 장사 없다. 물론 이 말을 하기에 아직 한여름 더위는 아니지만 더위는 성큼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그리고 둘째 담이 머릴 단발로 했으면 좋겠단 내 바람은 더위 앞에 자취를 감췄다. 이발하러 가자고, 손으로 가위질 시늉을 하며 담이한테 얘기할 때만 해도 담이는, 싫다는 '의미'의 의성어를 냈다. 하지만 막상 미용실에 데려가 뽀로로가 나오는 화면 앞에 앉으니 그렇게 순한 양이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담이 직전 아이가 얼마나 울부짖었던가. 오랜만에 간 마트에서 에스컬레이터 타기에 자신감이 충만해서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담이는 아주 짧게 커트를 했고 그것은 보는 사람마저 시원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곧장 중얼거렸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

집에 돌아와 저녁 준비를 하며 애플뮤직을 열어 '입영열차 안에서'를 재생했고 스테이션을 생성해놓았더니 그 시절 노래들이 줄줄 이어졌다. '내 마음 속의 너', '비처럼 음악처럼', '달의 몰락'... 줄곧 입이 바쁘게 흥얼거리며 저녁 준비를 하고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온이가 밤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안 될 거 없지. 작년 이 맘 때 우린 매일 저녁 산책을 했으니까.
밖으로 나오니 아이 둘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 앞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동네 이웃을 만났고 자연스레 산책을 같이 하며 그 분의 작업실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분이 내준 민트티를 마시며 나는, 아 나는 그만 저 아늑한 곳으로 빠져버렸다.

어떤 여행에서였다. 다들 마시는, 얼핏 보기에도 향긋해 보이는 초록 잎이 글라스 바닥에 깔린 그 뜨거운 차. 민트티였다. 거의 매일, 수시로, 여행하는 내내 마셨던 그 차. 그 향기. 그것이었다.
그런데 헷갈렸다. 모로코였나, 이스탄불이었나. 아이들이 과자를 얻어 먹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중에도 내 손은 글라스를 잡고 있었고 머리는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어디였나, 어디였지, 대체.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여행의 궤적을 좇고 있었고 하나 하나 떠올려보려 했는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기억이 아닌 기록에 의존해야 했다. 2010년과 2013년 사이가 문제였다.

2005년 인도&네팔, 미국
2006년 인도
2007년 쿠바
2009년 프라하
2010년 라오스
2011년 모로코
2012년 카슈가르, 홋카이도
2013년 베를린&암스테르담
2014년 히말라야
2015년 웨노섬
2016년 오키나와
2017년 이탈리아&파리, 더블린&로테르담

모로코였다.

페스에서의 산책을 또 다시 포기하고 카페 노리아에서 민트티를 마시고 다시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다. 환전은 여전히 못 하고 있었고 남은 50디람으로 저녁과 혹시 있을지 모를 배고픔에 대비해야 했다. 다행히 정원에서 숙소로 오는 길에 길게 시장이 늘어서 있었고 눈에 띄는 대로 바나나와 복숭아, 빵과 숙소 앞 가게에서 물과 비스킷을 샀다. 푸짐했다, 나름. (2011년 8월 29일 새벽의 기록) 

페스, 모로코, 2011

하지만 프루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내 추억 여행은 추억의 깊이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 추억을 줄줄이 소환해내는 것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의 열망으로 피어올랐다. 여행을 마치 의무처럼 대했던 시절도 있었고 그것 없이는 어떤 의미가 결여된 것처럼 여기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마도 아이가 생긴 이후겠지만, 그 감각이 현실과 상호작용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와버렸다. 

여행을 언제 했더라. 

여행을 하고 싶다. 아무 의심 없이 떠나는 것과 낯선 어느 곳에 덩그러니 놓여진 그 느낌이 문득 그립다. 

캐노피에는 사연이 있다

생각한 지는 꽤 됐다. 이 글 말이다.

첫째가 태어나고 세 번째 거처인 지금의 집에서까지 줄곧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따로 잠을 잤다(아닌 적도 물론 있지만 가급적 그러려고 했다). 아마 앞으로 꽤 오래 살게 될 지금의 집에서도, 처음엔 그랬다. 지금은 아니라는 얘기. 아이들 방과 부부 침실이 층이 다른 곳에 있는 구조적 요인이 컸다. 각자 한 명씩 맡아 아이들을 재우고 1층으로 내려와 본격적으로(?) 자면 거의, 언제나, 아이들은 자다가 깼다. 그럴 때마다 주로 아내가 올라가긴 했지만. 참다 못한 아내가 먼저 2층에서 자자고 했다. 나는 나대로 2층에서 자고 싶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침실이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게 공기 질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기를 한 달. 아이들은 푹 자는 횟수가 늘었고 불편을 호소하는 아내와 달리 나는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다. 
아이들 방에 있는 2층 침대의 2층은 대중없이 사용되는데, 요즘은 주로 내가 자는 편이다. 그리고 그 2층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창 밖을 보며. 

집을 지으며 기록에 대한 생각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지금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잔재들을 헤아릴 수가 없지만 생각했던 것에 비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늘 그렇듯 초라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그렇다고 언제든 뭔가 대단한 것을 쓰겠다는 포부는 없다. 다만 나의 방식으로 집에 대한 기록이 쌓여 갔으면 하는 바람뿐. 

2층 침대에 북쪽으로 머리를 대고 누우면 창 밖으로 거실 너른 창과 베란다가 보이고, 같은 박공이지만 아이들 방보다 층고가 낮은 거실 지붕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붕의 높이를 결정하던 순간과 징크 재료를 고르던 때, 베란다 하부의 단열재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베란다 우수 처리 능력까지, 여러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가지만 유독 한 가지가 선명한 실루엣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캐노피. 

캐노피에는 사연이 있다.
2층 골조 철근과 거푸집 작업이 있던 날, 조선생님과 현장에서 만났다. 캐노피 때문은 아니었다. 전날인지 언제인지, 저녁에 김실장님이 전화를 해 앞동 주방 쪽 지붕을 낮췄으면 한다는 의견을 전하며 도면을 보내왔다. 이유인즉 골목에서 봤을 때 담장이 있고 뒤로 물러서 있는 다른 집과는 달리 담장 없이 전면으로 배치된 집이 너무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
당일 점심 때 잠깐 현장으로 가 선생님을 뵀고 점심을 먹으며 대화가 이어졌다. 밥이 나오기 전까지, 선생님은 식탁에서 스케치를 하며 고민을 계속했다. 하지만 막상 지붕은 당초대로 가고 현장에서 급히 결정해야 할 문제로 캐노피가 대두되었다. 도면에는 - 나도 나중에야 제대로 확인했지만 - 거실 너른창에 바싹 붙어 캐노피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캐노피 재료를 콘크리트로 갈지 아니면 철판으로 갈지가 관건이었다. 철판으로 가면 열교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여 단열이 득이 되는 대신 비용이 올라가고 콘크리트로 갈 경우 지금 당장 철근과 거푸집 작업이 이뤄져야 했다.
약간의 대화가 오간 뒤 즉석에서 콘크리트로 결정되었고 바로 현장 작업이 진행됐다. 하지만 거푸집을 뜯어내고 나니 매우 육중한 자태로 캐노피가 도드라져 있었는데, 콘크리트 자체가 육중하기도 하지만 작업 여건상 창 바로 위에 골조 작업이 되지 않고 일정 간격을 두고 된 탓에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모습으로 그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캐노피는 창이 열리는 부분만 남기고 절단하기로 결정되었고, 그 모습이 현재의 캐노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