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넓은 길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옛날에 어느 유명한 건축가가 얘기했듯이, 길을 가다가 건너편에 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최소한 '아. 누구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좋은 길이라, 그 폭을 넘어서면 이 쪽하고 저 쪽하고 관계가 없는 거죠. 분당도 그렇지만 신도시에 가 보면 밤에 혼자 걸어갈 때면 사람은 별로 없고, 양쪽 인도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상점은 있는 데만 죄다 모여 있고, 아파트 근처는 컴컴해요. 조닝 플랜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섞이지 않는 겁니다. 그런 척도가 아쉬운 거죠. 멀찍이 보면 쾌적한 느낌으로 보일지언정, 그 쾌적함이 시각적인 거지, 심리적으로는... 물론 서울에 비해서 길이 넓으니까 쾌적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건 학습된 거죠. 미국이야 대중 교통이 좋지 않으니 차도가 넓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동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반드시 도시를 그렇게만 만들 필요는 없는 거죠. 모든 사람이 자가용 모는 것도 아니고, 우리 나라처럼 이렇게 좁은 지역에 몰려 살 때 꼭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조성룡, <응답하라, 도시 주택 (제2편)>, '시원하고 넓은 길', 웹진 民硏  


나는 어린시절에 서울의 가회동, 낙원동, 제동, 인사동을 중심으로 고불불한 많은 길을 누비며 걸어 다녔고, 자전거도 타고, 제기도 차며 그 길 속에서 자랐다. 그때 길은 나에게는 마당이요, 놀이터요, 시쳇말로 거실이요, 휴식의 처소요, 나의 몸 크기와 살갗에 알맞은 주위 공간이었다.
양쪽 팔을 벌리면 끝이 닿을락 말락 하는 좁은 골목에서부터 끝이 막혀있는 막다른 골목길에 이르기까지 골목길의 폭도 일정치 않을 뿐더러 아늑하게 구성되어 있어 보금자리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골목길에 깔릴 즈음에 대문이 삐걱 열리며 흰 한복 차림의 여자들이 치마 끝을 살짝 쥔 채로 문턱을 넘어 드나드는 풍경은 붉게 타는 저녁놀과 대비되어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처럼 골목길은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삶의 훈훈한 정과 체온을 빠짐없이 옮겨 주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또 지나가는 동네 어른이 그곳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가기가 어딘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그런 크기의 길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수근, <좋은 길을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92쪽, 김수근문화재단, 2016

2017/02/14

절기

절기력은 태양을 기준으로 한 달력이다. 그러니까 양력이다.
절기력은 태양이 지나가는 길, 곧 황도를 24등분하여 15도 또는 16도쯤으로 나눈 것이다. 그래서 절기는 15일 또는 16일 간격으로 이어지는데 태양의 위치에 맞추는 전형적인 천문력이다. 24절기 중 가장 분기점이 되는 동지, 곧 밤이 제일 길고 낮이 제일 짧은 동지를 알아낸 다음 그것을 기점으로 15일, 16일씩 매겨 가는 방식이다.
절기력은 기본적으로 날씨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날씨력이라 할 수 있다.
절기는 제일 큰 뼈대가 되는 게 이른바 기基절기인데 동지, 춘분, 하지, 추분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뼈대를 이루는 것은 이른바 입立절기로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이 그것이다. 이 절기들은 기본 구조로 24절기를 받혀주고 있고, 그 다음 이를 기초로 해서 세세한 절기들이 기절기와 입절기 사이에 두 개씩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까 입춘과 춘분 사이에는 우수와 경칩, 춘분과 입하 사이에는 청명과 곡우, 입하와 하지 사이에는 소만과 망종, 하지와 입추 사이에는 소서와 대서, 입추와 추분 사이에는 처서와 백로, 추분과 입동 사이에는 한로와 상강, 입동과 동지 사이에는 소설과 대설, 동지와 입춘 사이에는 소한과 대한이 그것들이다. 
_안철환, <24절기와 농부의 달력> 21-23쪽, 소나무, 2011


  1. 입춘立春
  2. 우수雨水
  3. 경칩驚蟄
  4. 춘분春分
  5. 청명淸明
  6. 곡우穀雨
  7. 입하立夏
  8. 소만小滿
  9. 망종芒種
  10. 하지夏至
  11. 소서小暑
  12. 대서大暑
  13. 입추立秋
  14. 처서處暑
  15. 백로白露
  16. 추분秋分
  17. 한로寒露
  18. 상강霜降
  19. 입동立冬
  20. 소설小雪
  21. 대설大雪
  22. 동지冬至
  23. 소한小寒
  24. 대한大寒

2017/02/13

저녁 강

자기를 밀어내 사구를 쌓는 강은 아름답다.
갈대구름은 그곳에서 피어난다.
은어 풀어주기 전에
먼저 젖지 않으므로
천천히 물 위로 나를 밀어내는 저녁 강
나는 가라앉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내어 생을 이룬 강이
흐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주창윤


몇 주 전부터 계속 입가에 맴돌던 시였는데 어디서 보았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 일기를 정리하는데, 작년, 꼭 이맘 때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에서 이 시를 보았던 것이다. 내게는 <행복한 책읽기>가 세 권 있는데, 오늘 집어든 것은 오래된 책 냄새가 가득한 전집 15권. 독서욕을 한껏 솟구치게 하기에 김현의 일기만한 글도 없다. 치열함. 그리고 열정. 김현의 글을 오래 곁에 두고 싶다.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국내 작가들을 좀 더 많이 접하고 싶다.

2017/02/03

내게 소설에 대해 가장 많은 걸 가르쳐준 이는 역시 카버인 것 같다. <대성당>의 작가. 그중에서도 내겐 <칸막이 객실>이 교과서다. 기억에서 지울 수도 돌아가 고칠 수도 없는 한 순간을 팔 년 동안 외면해온 쓸쓸한 이의 이야기인 이 소설에는, 이미 그 한순간에 제 삶이 다른 궤도로 접어들었음을 뒤늦게나마 불현듯 깨닫는 장면이 있다. 지각(知覺)의 지각(遲刻). 그런데 정작 소설이 문제 삼는 건 깨달음이라기보다는 그 이후다. 팔 년 동안 엉뚱한 곳을 이방인처럼 헤매던 주인공 마이어스는, 비로소 깨달았음에도 다시금 모르는 곳으로 간다. 카버가 이걸 보여주는 방식은 너무도 절묘한데, 행선지를 알 수 없는 기차의 역방향 좌석에 앉아 눈을 감는 결말이 그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기차는 삶의 은유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그 삶으로부터 뒤돌아 앉은 한 사람. 그렇게 <칸막이 객실>은 산다는 건 다른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계속 길을 잃는 일일 뿐이라고, 그저 지난 삶 쪽을 바라보며 어딘가로 계속 떠밀려가는 것일 뿐이라고 가르쳐준다. 고작 그런 걸 무려 이렇게나 애쓰며 살고 있다니, 슬프다기보다는 차라리 우습지 않은가. 하지만 그 삶에서 단 한 발짝도 떨어질 수 없는 우리에게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그것이 줄곧 비극이기만 하다. 
_황현경, '뒤로 돌아', 악스트(2006. 11/12)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카버의 <칸막이 객실>을, 그래서 읽었다. 짧은 문장으로 단편을 써내려간 카버의 글은 쉬 읽히지만 멍한 여운을 남기는 때가 많다.

마이어스는 진행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앉았다. 차창 밖 시골 풍경이 점점 더 빨리 스쳐가기 시작했다. 한순간, 마이어스는 그 풍경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어딘가로 가고 있었고, 그걸 알았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방향이라면, 조만간 그는 알게 되리라.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사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떠들었다. 그에게는 그 목소리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목소리들이 움직이는 기차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마이어스는 자기 몸이 어딘가로 실려가고 있다는 걸 느끼는가 싶다가, 그렇게 뒤로 뒤로 잠 속으로 들어갔다. 
_레이먼드 카버, '칸막이 객실', <대성당> 86-87쪽, 문학동네, 2014(개정판) 

문학작품이 작가의 개성적 문체와 이야기로 보편성을 지녀 대중에게 울림을 줄 수 있을 때, 많은 이들은 좋은 작품이란 평을 하는 것 같다. 거기에 그리고 황현경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막상 카버의 책을 다시 펼쳤음에도 나는 황현경의 문장과 카버의 단편을 잇는 데 실패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마이어스가 객실을 비운 사이 사라진 손목시계의 행방과 그가 아들을 만나려고 했던 스트라스부르에서 내리지 않고 타고 있던 열차의 행선지가.

2017/02/02

존 밴빌, <바다>(문학동네, 2016), 정영목 옮김

<바다> 같은 소설을 쓴 사람이 한평생을 꽤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이 놀랍고, 그 성실한 삶을 여러 부분으로 쪼개 운영해왔다는 것도 놀랍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일랜드의 노동계급 출신으로 잘 안 팔리는 소설을 쓰는 작가의 생존 방식이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2005년 맨부커상을 놓고 가즈오 이시구로와 경합을 벌일 무렵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양장본만 2만5천 부 가까이 팔린 반면, 밴빌의 <바다>는 겨우 3천 부가 조금 넘게 팔렸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헤아린다면 밴빌의 성실한 직장 생활을 포함한 많은 과외 활동은 다른 이유와 더불어 자신이 예술가로서 하는 일을 제대로 해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1968년 미국에서 생활할 때 만난 부인 재닛 더넘은 글을 쓰고 있을 때의 그를 가리켜 "막 유혈이 낭자한 살인을 마치고 돌아온 살인자" 같다고 말했다는데, 밴빌의 조건을 떠올리면 이 말을 여러 의미에서 되새겨보게 된다. 
_정영목, <바다>(문학동네, 2016) 해설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 조지 버나드 쇼... 프랑스 작가들에 빠질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아일랜드 작가에 매료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존 밴빌이 (진부한 표현이지만) 혜성처럼 등장했다.
밴빌을 알게 된 건 악스트Axt(2016. 11/12)에 실린 번역가 정영목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는 '삼각관계'라고 제목 붙인 글에서 그가 번역한 두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쓴 두 작가를 이야기한다. 거기에 자신을 끼어넣어 삼각형을 그리면서.

내가 원래 <바다> 같은 작품을 좋아했던가? 그것은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런 유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그 전에 오랫동안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직업적인 이유로 <바다>를 읽게 되었는데, 이건 어쨌든 좋았다! 감추어져 있던 취향이 발견된 걸까? 아니, <바다>가 내게서 취향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좋은 작품의 힘이란 그런 거겠지. 자신만의 설득력으로 자신에 대한 취향을 만들어내는 것. 
_정영목, '삼각관계', 악스트(2016. 11/12) 

아, 나의 경우는 정영목에 빗대자면, 그냥 취향이라고 해야 할까. 단순히 그렇게 말하고 말기에 <바다>는 지나치게 매력적이다. 압도적인 분위기, 낯설지만 돋보이는 표현들, 새로움. 이 모든 것들이. 그래서 악스트를 읽고, <바다>를 읽고 내친 김에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문학동네, 2009)까지 읽었다. <에브리맨>을 다시 읽은 이유는 단순하다. 가디언에 실린 밴빌의 서평 - <에브리맨>의 모든 것은 헨리 제임스였다면 몇 페이지에 다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 때문에. 그렇다. 그 두 작품은 <바다>와 <에브리맨>이다.

Our lives are a shimmer of nuances between the two fixed poles of birth and death. That flash which is our being-here, brief though it be, is infinitely complex, made up of poses, self-delusions, fleeting epiphanies, false starts and falser finishes - nothing in life finishes save life itself - all generated from the premise that the self is a self and not merely a persona, a congeries of selves. Literary art cannot hope to express that complexity, but it can, by the power of style, which is the imagination in action, set up a parallel complexity which, as by magic, gives a sufficiently convincing illusion of lifelikeness. (John Banville, guardian, 2006)
우리 삶은 출생과 죽음이라는 고정된 양극 사이에 아른거리는 뉘앙스들이다. 여기 우리의 존재라는 그 반짝임은, 비록 짧지만, 무한히 복잡하여, 겉치레, 자아 기만, 덧없는 현현, 그릇된 출발과 더 그릇된 마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 삶에서는 삶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 이 모든 것이 자신은 자신이지 단순한 등장인물, 자신들이 모인 덩어리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발생한다. 문학예술은 그런 복잡성을 표현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스타일, 즉 작동하는 상상력의 힘으로 그에 대응하는 복잡성을 구축할 수 있으며, 삶과 닮은 상태라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환상을 제공할 수 있다. (번역 정영목)

이 글을 읽는 순간, <바다>에 대해 사실 더 할 이야기가 사라졌다. 로스와 대비되는,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마저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다니!

서울

가보지 않은 서울에 가봤다고 거짓말하면서 슬그머니 가슴이 두근거리던 기억도 난다. 아마 나는 서울이란 이상한 일이 얼마든지 있는 곳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후로도 내가 친구들에게 이상한 일을 얘기할 때는 "이것은 서울에서 일어난 얘기다"고 했으니까. 
_김승옥, '나의 첫 창작', <뜬 세상에 살기에> 54쪽, 예담, 2017

김승옥의 수필집이 출간됐다. 1977년에 초판이 나왔던 책인데 40년 만에 새로 꾸미고, 당시 초판의 복간본도 함께 묶어 판매하고 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배송된 책을 훑어보고 있으니, 괜히 기분이 새롭다. 김승옥의 오래된 새글을 읽는 기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