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내게 친숙한 도시다.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서울에 살았고, 사는 동안 서울의 많은 곳을 좋아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곳들이야말로 내겐 서울의 이미지요, 서울의 목소리다. 하지만 지금, 올림픽대로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의 서울에 대한 친숙함이 이제는 그리움 또는 애정 가득한 편안함으로 바뀌고 있음을 실감한다. 물론 지긋지긋한 서울의 복잡함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교통 정체로 대변되지만, 더 이상 서울에서 일상을 영위하지 않게 된 지금은 이마저도 서울이지 -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서울이 내 안에서 두 번째 고향 같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면, 용인, 아니 그보다는 수원이 삶터이자 일터로서 그동안 서울이 맡았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수원이 아닌 이곳 서울에서 실감한다. 이제 나는 수원에 산다.
여의도 다녀오는 길에
2016/11/05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그 꽃 말이에요 /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 떨어지는 꽃송이가 /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 못 떠나실 거예요 /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동백나무의 꽃이 지는 모습은 보는 이들 누구에게나 선연하게 가슴에 남는다. 꽃잎 하나 상하지 않은 그 붉은 꽃 덩어리가 그대로 툭툭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모습을 두고 가장 극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제주도나 이웃 일본에서는 이를 불길하게 여기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꽃이 떨어지는 모습이 목이 잘려 사형을 당하는 불길한 인상을 주며 또 이 나무를 심으면 집에 도둑이 든다 하여 꺼리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싱싱하던 이 꽃이 갑자기 떨어지는 것을 연상하여 갑자기 생기는 불행한 일은 춘사(椿事)라고 한다. '춘椿'은 동백나무를 가리킨다.
이유미, <우리 나무 백가지> 41쪽, 현암사(개정증보판)
천천히, 하루에 한두 나무 정도씩 읽고 있다. 나무들의 사연이 어찌나 흥미로운지!
몸의 반응에 순응하며 사는 것, 서른 중반을 지나 그것을 실감하며 그럴 때마다 나의 의지 없음을 탓하는 통시에 다니엘 페낙의 훌륭한 소설 <몸의 일기>(조현실 옮김, 문학과지성사)를 생각하게 된다. 나도 그렇게 진솔하게, 내가 내 몸을 느끼듯 쓸 수 있다면. 쓰기의 진실이란 사실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온몸이 반응하는 그대로 써내려 가는 그것, 말이다.
내일은 오랜만에 '광장'에 가야겠다.
몸이 역사다. 역사는 흘러온 것이 아니다. 문제제기 될 뿐이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침략에서 돌아올 때 사랑하는 조제핀에게 편지를 보낸다. "곧 도착할 테니 씻지 말고 기다리시오." 냄새를 제칠 만큼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원래 후각은 근대에 와서 가장 억압당한 감각이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목욕, 위생, 소독이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정희진의 어떤 메모, 한겨레신문
내일은 오랜만에 '광장'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