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 말하지 마라
온 사회가 세월호였다
오늘 우리 모두의 삶이 세월호다
자본과 권력은 이미 우리들의 모든 삶에서
평형수를 덜어냈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덜어내고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성을 주입했다
그렇게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노동자 세월호에 태워진 이들이 900만 명이다
사회의 모든 곳에서
'안전'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어야 할 곳들을 덜어내고
그곳에 '무한 이윤'이라는 탐욕을 채워 넣었다
이런 자본의 재해 속에서
오늘도 하루 일곱 명씩 산재라는 이름으로
착실히 침몰하고 있다
생계 비관이라는 이름으로
그간 수많은 노동자 민중들이 알아서 좌초해가야 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이들이 지하 선실에 가두어진
이 참혹한 세월의 너른 갑판 위에서
자본만이 무한히 안전하고 배부른 세상이었다
그들의 안전만을 위한 구조 변경은
언제나 법으로 보장되었다
무한한 자본의 안전을 위해
정리해고 비정규직화가 법제화되었다
돈이 되지 않는 모든 안전의 업무가
평화의 업무가 평등의 업무가 외주화되었다
경영상의 위기 시 선장인 자본가들의 탈출은 언제나 합법이었고
함께 살자는 모든 노동자들의 구조 신호를 외면당했고
불법으로 매도되고 탄압당했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자본의 이동은 언제나 자유로운 합법이었고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만 전가되었다
그런 자본의 무한한 축적을 위해
세상 전체가 기울고 있고 침몰해가고 있다
그 잔혹한 생존의 난바다 속에서
사람들의 생목숨이 수장당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돌려 말하지 마라
이 구조 전체가 단죄받아야 한다
사회 전체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이 처참한 세월호에서 다시 그들만 탈출하려는
이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위험한 세월호의
선장으로 기관장으로 갑판원으로 조타수로 나서야 한다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평형수로 에어포켓으로
다이빙벨로 긴급히 나서야 한다
이 세월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이 자본의 항로를 바꾸어야 한다
송경동
2016/10/08
2016/10/07
Waltz for Debby
2016년 6월 14일 저녁
분만실에서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들었던 음악은 빌 에반스 트리오의 <Waltz for Debby>였다.
그리고 오늘, 씨디를 샀는데, 나중에 아이가 크면, 그래서 혼자서도 음악을 즐기며 들을 나이가 되면, 선물해 주고 싶다.
그날 지속된 이 그룹의 상상력의 열매는 이 음악을 반복적으로 듣게끔 만들었으며, 감상자의 정신적, 정서적 지구력을 계속 환기시켜 주었다. 각각의 작품들은 마술 세계의 결정체를 확보하고 있었다. 1970년대 에반스 트리오에서 잠깐 드럼을 연주했던 빌 굿윈이 말했듯이. "빌, 스콧 그리고 폴 모티안이 함께 하면 그들은 무얼 할 것인가를 미리 알고 있는 듯했으며, 즉석에서 만들어진 사운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즉각적인 신뢰감이었다." 이 유산은 빌 에반스 최고의 시절로 불리고 있으며,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풍성한 녹음 속으로 빠져들 때 우리는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정점과 에반스가 평생을 통해 추구했던 성과에 대한 하나의 매개체를 목격하게 된다. 느낌의 깊이, 그룹 내부의 친밀감, 그리고 부드러운 촉감의 미적인 개념에 있어서 이 녹음들은 견줄 수 없는 영원함을 지닐 것이다.
열흘 뒤 늦은 밤, 스콧 라파로는 뉴욕 주 북부에 위치해 있는 그의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 제네바로 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20번 국도에서 동쪽으로 향한 한 시골길에서 그는 나무와 충돌했고,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에반스와 모티안은 모두 그 소식에 넋을 잃었다. 이는 라파로라는 한 개인의 상실일 뿐만 아니라 베이스 주자를 분신으로 여겼던 에반스의 이상적인 삼두체제의 종말이었다. 그 충격으로 에반스 그룹의 창의성이 일으켰던 불꽃은 무참히 꺼졌으며, 이 베이스 주자의 죽음은 에반스 자신 속에서도 그 무언가를 살해했다.
"사람들이 재즈를 지적인 이론으로 분석하려고 할 때 난 당혹스럽다. 그건 아니다. 재즈는 느낌이다."
"원칙과 자유는 섬세하고 창조적으로 섞여야 하며 정말로 훌륭한 결과를 낳아야 한다. 난 모든 음악이 낭만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인 감상주의에 빠지면 낭만성은 방해받게 된다. 반면에 원칙에 의해 운용되는 낭만성은 가장 아름다운 미적 대상이다. 이러한 조화가 이 특별한 트리오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난 생각한다."
피터 페팅거, <빌 에반스, 재즈의 초상> p.201-202, p.204, 황덕호 옮김, 을유문화사
못 말리는 습성대로, 빌 에반스를 '읽는다.'
2016/10/04
스코트가 자주 사용한 좋은 말이 있어요. "당신이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친절하라."예요. 그 말은 살아가는 원칙으로 삼기에 괜찮은 말이지요. 올더스 헉슬러는 육십인가 칠십이 넘어서 그의 모든 공부와 작품과 연구를 모두 무색케 하는,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조금 더 친절해지는 것임을 깨닫고서 느낀 당황에 대해서 썼어요. 버트란드 러셀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그도 그 말을 하기를 난처해 했지요. 사랑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기초라고-. 한 사람이 숲속에서 농부로 살면서 전혀 세상에 나가지 않았어도 친절과 단순함의 삶을 살았다면 공헌을 한 거예요. 세상을 더 나쁜 장소로 만든 게 아니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한 거지요.
스코트의 백 번째 생일에 이웃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조그만 행렬을 이루고 왔어요. 그 깃발 중의 하나에 이렇게 씌어 있었어요. "스코트 니어링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되었다."
헬렌 니어링, '아흔 살의 관점', <녹색평론선집 2> 415-416쪽, 녹색평론사
2016/10/03
예전에 비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우리가 살고 있는 방은 무척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그 집과 방이 계속 좁다고 느껴지고, 계속 좀 더 늘리길 원합니다. 사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고 다니는 여러 가지 짐들이 늘어난 때문입니다. 침대, 책상, 소파 등등 비대해진 가구들과 가전제품들, 평생 안고 다니는 여러 가지 집에 대한 공연한 강박들이 우리의 집을 키우고 더불어 우리의 근심도 키워낸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강박 속에서 살아왔던가요. 사회 속에서, 관계 속에서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약간의 일탈도 허용하지 않는 강박들 때문에 우리는 결국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걷고, 뛰고, 자고, 생활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특히 집에 대해서는, 일정한 나이에 일정한 크기의 일정한 형식의 집에 살아야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 삶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그런 강박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혹은 자신만의 공간으로서 작은 집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의식의 전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작은 집이란 단순히 규모가 작은 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이며, 자기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더욱 깊이 배어 있습니다.
집을 통해 자기가 완성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몸을 스스로 거울에 비쳐보지 않은 채, 남들이 나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로, 혹은 남들의 몸을 보고 자신의 몸으로 착각하여 지은 집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야말로, 나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임형남+노은주, <사람을 살리는 집> 75-76쪽, 예담
2016/10/02
왜 뇌가 피로해지는 것일까? 뇌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뇌의 구피질과 신피질의 알력과 갈등이 주원인이다. 인간의 뇌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뇌간이다. 뇌간은 호흡, 심장 박동, 혈압 조절, 체온 조절 등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2층은 대뇌변연계로 감정을 다스리고, 식욕, 성욕 등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본능을 주관한다. 기억도 변연계에 있는 해마의 역할이다. 맨 위 3층은 대뇌신피질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감정과 충동을 조절한다.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뇌로, 이것이 있어 인간이 고도의 정신 기능과 창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뇌의 피로를 이해하려면 뇌를 3층 구조가 아닌 3층의 신피질, 2층의 변연계와 1층의 뇌간을 합친 구피질로 구분하는 것이 편하다. 신피질이 지적 중추로 의지, 의욕, 판단을 담당하는 '인간의 뇌'라면 구피질은 생명 중추로 감정과 본능을 주관하는 '동물 뇌'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인간 뇌와 동물 뇌는 서로 협조하기도 하지만 서로 반발하는 경우도 많다. 아침에 구피질은 "조금만 더 자자."고 유혹하는 반면 신피질은 "안 돼.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이야."라며 맞선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나 질책을 받으면 구피질은 "당장 사표를 던져. 일할 데가 여기뿐이야."라며 화를 내지만 신피질은 감정을 추스르고 계속 회사에서 일하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현대인은 끊임없이 구피질의 유혹을 신피질의 이성으로 제어하면서 산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너무 피로해 쉬자는 구피질의 당연한 요구를 무시할 때도 많다. 평소에는 신피질이 구피질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신피질과 구피질의 충돌로 뇌에 피로가 쌓이고 쌓여 그로기 상태가 되면 구피질은 더 이상 신피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구피질의 역할은 생명을 지키는 것이어서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신피질이 아무리 사정을 해도 듣지 않는다.
이시형.김준성, <의사가 권하고 건축가가 짓다> 60-61쪽, 한빛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