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08

주말, 느지막이 집에 들어오니 누나가 거실에 불을 켜둔 채 뻗어 있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그러고 있길래 피곤하면 들어가 자, 라고 했더니 뭐라 중얼거리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뭐라고? 되묻는 내 말에 한마디 내뱉는 것조차 힘겹다는 듯 꺼낸 단어는 설거지였다. 순간 머리는 회전한다. 아, 나도 피곤한데, 내일은 월요일이고. 하지만 마음은 동정한다. 하루 종일 아이 둘을 보살피느라 얼마나 피곤했을까. 나는 크림을 온몸에 듬뿍 바르는 동안 고민을 했고 결국 부엌으로 향했다. 개수대에 가득 쌓여 있는 그릇들을 물로 가볍게 행군 후 차근차근 설거지를 하는데 문득 어느 부끄러웠던 때가 떠올랐다. 

며칠 전이었다. 퇴근길 전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얼음과 뒤섞인 자줏빛 액체가 흔들리는 전철의 움직임을 따라 선을 그으며 전철 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자줏빛 액체의 줄기를 따라 고개를 움직여 보니 한 남녀 커플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상대방 탓을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자신들이 공공장소에서 저지른 일을 수습은 해야 할 터. 그런데 마땅한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여성의 가방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얼마 되지 않는 휴지로 남성이 허리를 숙여 수습을 하는 모습을 보자 내 머릿속에는 가방 안에 든 일간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왜 저러지, 왜 하필 이런 데서 티격태격하는 거야, 결국 이렇게 남들 피해줄 거면서, 라는 생각이 앞섰고 선뜻 가방에 든 신문으로 손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자줏빛 액체가 기어코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앞까지 흘러오자 이건 아니다 싶어 신문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미 그들 앞에 앉던 한 중년 남성이 자신이 보던 신문을 건낸 뒤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신문을 꺼내려던 내 손을 거뒀다. 찰나에 가까운 그 시간, 그러니까 잘못이 있든 어쨌든 그것보다 상황 수습이 먼저라는 기본적 생각을 미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일이 떠올랐다. 

역시나 전철을 타고 출근을 하던 아침이었다.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뒤섞인 혼잡한 전철에 앉아 있던 나는 그때에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책에 고정된 시선에 무언가 자꾸만 어른거리는 듯한 모습이 감지되어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바로 앞에 선 대학생으로 보이는 날씬하고 키가 큰 남성이 어지럽고 속이 거북한 듯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약간 비틀거리며 입을 가리고 있었다. ‘왜 이러지' 뭔가 불안했다. 책에 집중할 수 없었고 곧 무슨 일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혼잡한 전철에서 어찌 하는 것보다 내릴 때까지 아무 일 없길 바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불안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여전히 책을 읽는 척하고 있던 시선 앞으로 고체 덩어리가 섞인 불투명하고 걸쭉한 액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아니나다를까 그 학생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구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피해 혐오스런 눈길로 그 학생을 바라보던 내 귀에 한두 사람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신문지 있으신 분 없어요?”
아, 심한 부끄러움이 날 습격했다. 나는 내 한 몸 더럽혀질까 재빨리 자릴 피했을 뿐인데 그 혼잡한 전철에서도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그 학생이 왜 구토를 하는지, 공공장소인지 어떤지를 떠나 당장의 상황을 수습하고 그를 돕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내가 그에게 혐오스러운 눈길을 던진 건 그가 채 가시지 않은 숙취 때문에 그러는 것일 거라고 단정지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곳곳에서 “여기요" 하는 외침과 함께 신문지가 등장했고 그 학생은 묵묵히 건네 받은 신문지로 자신의 토사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수습이 끝나자 맞은편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은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앉으라며 자리까지 양보를 하셨다. 
나는 나를 덮친 심한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모르며 곧 도착한 정거장에서 하차를 했고 그토록 혼잡했던 전철에서의 타인에 대한 사람들의 따스한 배려에 깊이 감동을 했다. 그때 내 가방엔 역시나 일간지가 있었지만 자릴 피하기에만 급급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감히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