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29
체 게바라의 편지 - 아이들에게
사랑하는 일디타, 알레이디타, 카밀로, 셀리아 그리고 에르네스토에게.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나는 더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들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기를 바란단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을 정복하기 위해 많이 공부하여라.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해주기 바란다.
특히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늘 너희들을 다시 보길 바라고 있으마. 아주 커다랗고 힘찬 키스를 보낸다.
아빠가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다.
"체 게바라는 정말 체력이 좋은 것 같아. 혁명을 하면서도 산속에서 밤중엔 책을 보고 있잖아!"
독서, 책읽기에 대한 집착이 강한 나에게는 남들이 체 게바라를 칭송하는 이유에 책이라는 요소가 더해진다. 어릴 적부터 천식이 심했던 그는 호흡곤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면 책읽기에 몰두하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을 하면서도 늘 책과 노트를 지니며 틈 나는 대로 책을 읽고 기록을 남겼으며, 죽음 전 볼리비아에서 생포되었을 때에도 그의 소지품엔 평소 좋아하던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이 발견되기도 했다. 자신 자체로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혁명 중에 낮에는 싸우고 밤에는 혁명가들을 가르치기에 바빴다.
에르네스토가 아르헨티나의 의학도였을 때 알베르토와 함께 떠난 남미 여행에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 나병환자는 깜짝 놀라고 만다. 누구도 그들에게 손을 내민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랬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투쟁을 이어가면서도 가슴 한켠에는 늘 온화한 감성을 유지했다. 나는 이런 그의 모습이, 오랜 독서와 여행을 비롯한 다양한 경험, 그로부터의 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한다.
생전의 체를 만난 어떤 여성은 이미 그의 명성이 두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외모에 설렜다고 고백했지만, 나에게 그의 외모는 부수적일 뿐이다. 나는 그의 독서광의 면모와 행동하는 실천적 의지에서 그를 오롯이 내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 여전히.
십여 년 전, 지금은 없어진 대학로의 작은 극장에서 본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불현듯 떠오른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비록 여행을 계획하고는 있었지만 미처 실행하고 있지 못하던 때였고 이후 여행을 하며 내 의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 삶은 그렇지 못했고 여전히 그러지 못하고 있다.
체 게바라의 편지 - 피델
이 순간 나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마리아 안토니아의 집에서의 첫 대면, 당신과 함께 가자는 제의, 그리고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그 모든 긴장들. 언제인가 누군가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지요. 죽어야 할 순간이 오지 않겠느냐고, 죽어야 할 순간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우리를 사로잡았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었고 (어차피 그래야 한다면) 혁명 속에서는 이기는 자도 있으며 죽는 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승리로 오는 길목에서 많은 동지들이 그렇게 쓰러져갔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그때만큼 극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더 원숙해졌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반복되는 법입니다. 나는 쿠바혁명에서 내가 할 바의 몫을 수행했다고 여기며, 어느덧 내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당신과 동지들, 그리고 쿠바 국민들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나는 당에서의 내 직책과 장관으로서의 직위, 대장이라는 계급, 그리고 쿠바 시민권을 공식적으로 내놓습니다. 쿠바와 나를 묶어놓을 어떠한 법적 구속력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유일한 끈이 있다면 또 다른 속성의 것, 즉 공식적인 문서로는 파기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지나간 내 삶을 돌이켜보건대, 나는 혁명의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부심을 갖고 일해왔다고 믿습니다. 내가 저지른 유일한 큰 실수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투쟁하던 그 초기 시절보다 당신을 더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과, 지도자와 혁명가로서 당신의 역량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찬란한 날들을 살아왔습니다. 당신의 곁에 머물면서 카리브 해의 위기가 야기한 슬프고도 저 빛나는 시간들을 우리의 민중과 더불어 함께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낍니다. 그날들보다도 더욱 빛나는 시간을 가진 정치가는 없을 겁니다. 아울러 망설임 없이 당신을 따랐고, 당신의 사고방식에 내 자신이 기꺼이 따랐다는 점 역시 자랑스럽니다.
이 세계의 다른 땅에서 미약하나마 나의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쿠바의 수반으로서 지고 있는 책임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작별하여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당신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희열과 고통이 어지럽게 내 마음을 휘젓는군요. 여기에 나는 건설자로서 나의 가장 순수한 희망을 두고 갑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이지요. 그리고 나를 친자식처럼 따뜻이 맞아주었던 쿠바의 민중을 두고 떠납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희망의 일부로서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막론하고 새로운 전장에서 나는 당신이 나에게 심어주었던 신념, 민중의 혁명 정신, 가장 성스런 의무를 수행한다는 감정을 늘 지니고 있을 겁니다. 이것들이 있다면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위로받고 치료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듭 얘기하건대, 나는 쿠바혁명이 주었던 모범만은 제외하고 모든 책임으로부터 쿠바를 자유롭게 해주렵니다. 혹시 또 다른 하늘 아래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바로 쿠바 국민, 특히 당신에게 향할 것입니다. 당신의 가르침과 모범에 대해 감사하며 내 행동의 결과에 늘 확신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혁명의 외부정책과 늘 일치해왔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내가 어디 있건 간에 나는 쿠바 혁명가로서의 책임감을 숙지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것입니다. 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지만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러는 것이 오히려 기쁠 따름입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국가가 그들의 생활과 교육을 충분히 책임져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당신과 우리 국민에게 할 얘기가 산더미같이 있습니다만 한편으론 말이 필요치 않을 거라 느낍니다. 말로써 내 바람을 다 표현할 수도 없는 일이며, 그런 말장난이 굳이 필요치 않다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승리를 쟁취하는 날까지, 영원한 전진! 조국, 아니면 죽음을!
나의 모든 혁명적 열정을 다하여 당신을 포옹합니다.
체 게바라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체 게바라의 편지 - 부모님께
사랑하는 두 분,
다시 한 번 나의 로시난테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낍니다. 칼과 방패를 챙겨 들고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부모님께 작별의 편지를 썼던 것이 어느덧 십 년이 지났군요. 혹시 기억하고 계시다면 제가 훌륭한 군인이자 좋은 의사가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러나 이제 훌륭한 의사는 더는 저의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저는 썩 형편없는 군인은 아니기 때문이죠.
본질적으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의 마르크스주의가 더욱 깊어졌고 정제되었다는 점을 전보다 더욱 자각하고 있다는 점만을 제외하곤 말입니다. 저는 해방되고자 하는 민중들의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무장투쟁밖에 없다고 믿으며 이 신념을 일관되게 따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무모한 모험가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압니다. 물론 저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모험가지요. 바로 자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 있는 그런 모험가 말입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길 기대하지만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는 두 분에게 마지막으로 포옹을 보내는 셈이지요.
생각해보면 두 분을 너무너무 사랑하면서도 저는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질 못했습니다. 저는 제 행동에 지나치게 완강했고 더러는 그런 저를 이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사실 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만은 저를 믿어주십시오.
이제 예술가의 희열로서 연마한 제 의지가 무뎌진 다리와 지친 폐를 지탱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지막까지 나아가겠습니다.
가끔은 이 20세기의 난폭한 모험가인 이 못난 아들을 기억해주시겠지요. 셀리아와 로베르토, 후안 마르틴과 파토틴, 그리고 베아트리스 이모에게 키스를 보냅니다. 모두를 사랑합니다.
방자하고 고집 센 아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체 게바라 그리고 산타클라라
일출 너마저, 바라데로 |
예정에 없던 바라데로에서의 석양과 아침의 태양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렇게, 석양과 일몰로 완벽히 각인된 바라데로를 떠나는 마음은 왠지 아쉬웠지만 산타클라라로 향하는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드디어 체를 만난다는 실질적 기분이 들어서이다.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 후 산업부장관, 국립은행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홀연히 콩코로 뛰어들어 무장투쟁을 돕고 볼리비아에서 투쟁을 이어가다 결국 붙잡혀 사살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볼리비아 밀림에 사실상 버려진 그의 시신이 쿠바와 아르헨티나 정부의 노력으로 발굴되어 쿠바로 돌아오는 데에는 자그마치 3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혁명투사들의 시신은 쿠바혁명의 가장 빛나는 승리로 기억되는 산타클라라에 안치되었다. 1997년의 일이다.
산타클라라 혁명광장의 체 게바라 |
바라데로를 떠난 버스가 마침내 산타클라라로 진입하고 있을 즈음, 친절한 버스기사는 잠시 버스를 세우고 육성을 울린다. 저 멀리 체가 보이느냐고.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창밖으로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마치 당장이라도 총부리를 겨누고 전진할 듯한 체의 동상을 카메라로 캠코더로 눈으로 응시한다.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다시 천천히 버스가 움직이고 버스의 움직임에 따라 체의 모습도 각을 달리한다.
기념관을 비롯해 정식으로 혁명광장을 찾을 예정이었지만 그 모습을 미리 본 이상 지나칠 수 없었다. 먼저 혁명광장에 들렀다. 많은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고 나는 먼발치에서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로모로 몇 컷 담아냈다. 체를 감싼 새파란 하늘이 유독 아름다웠다.
승리할 때까지 |
Che Guevara, Santa Clara, Cuba, 2007 |
스물한 살 무렵 알게 된,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 데 6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의 평전을 읽고 쿠바에 관심을 갖고 유재현이 쓴 쿠바 관련 책을 읽고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보며 가슴을 쿵쾅거리고 실제 쿠바에 닿게 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사르트르가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치켜세운 체 게바라가 죽은 1967년 이후, 그의 얼굴은 세계 곳곳의 혁명의 현장에서 깃발이 되어 나부꼈지만 21세기 지금에 이르러서는 가장 매력적인 상품으로 변모되었다. 물론 이마저 지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여전히 나는 그것이 상품이든 책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의 이름이나 얼굴을 보면 가슴이 뛴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마다 내게 말을 걸어온다. 아직도 여전히 그러고 있느냐고.
체 게바라가 현대의 자본에 의해 어떤 식으로 활용되든 간에 이곳은 산타클라라다. 쿠바 전역 어디에서든 그의 얼굴은 벽화로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산타클라라에서 그를 만나는 느낌은 사뭇 진지할 수밖에 없다.
다음 날, 시가 공장에 들렀다가 다시 체를 찾은 나는 그의 무덤 앞에 있는 흉상 위로 앙증맞게 빛나는 별을 보며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곳을 빠져 나와 시가 공장에서 산 시가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손가락보다 굵은 시가의 맛은 썼고 연기는 매캐했다.
체는 영혼의 순례자였다.
사랑이 담긴 희망을 내보였고, 투쟁을 선택하는 용기를 보였다.
체가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고 단언했을 때 이것은 ‘함께한다'는 것을 뜻한다.
체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도 함께했다.
그는 바로 휴머니즘의 전도자였다.
“별이 없는 꿈은 잊혀진 꿈이다"라고 엘뤼아르는 말했다.
별이 있는 꿈은 깨어 있는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체는 한 번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이 씌어지고 난 뒤 1997년 10월 17일, 죽은 지 30년 만에 체 게바라는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2014. 6. 28.
2014/06/26
출판도시에서
紙之鄕 |
출판도시, 게스트하우스 지지향紙之鄕. 생각보다, 기대보다 멋진 곳이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의 위치가 그러한 효과를 더욱 끌어올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멋진 곳이다. 약간 비틀어진 서쪽을 향해 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음악은, 아까 로비에 있는 갤러리 지지향 - 곧 열린도서관 <지혜의 숲>으로 거듭날 - 에서 들었던 오페라 음악에 자극을 받아 정경화의 바이올린 음반을 틀어두었다.
지혜의 숲 |
열화당 |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건 오후 4시 무렵. 오전에 일어나 빨래를 돌리고 집안을 대충 정리한 다음 바라데로 편 쿠바여행기를 빠르게 쓰고 대충 짐을 쌌다. 그리고는 씻고 집을 나서 일상日常에 들러 커피를 사고 스시를 포장해 집으로 돌아와 요즘 즐겨 마시는 스파클링워터와 함께 먹었다. 음악을 조금 크게 틀고선 - 전제덕과 데파페페 - 커피를 듬뿍 내렸다. 다행히 텀블러에 담아갈 커피는 잘 내려졌다. 집에 오는 길에 사온 과일을 통에 담는 걸 끝으로 출발 준비를 마친 우리는 3시가 되어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운전은 내가 했다. 막히지만 않으면 출판도시 가는 길은 운전하기에 참 기분이 좋은 길이다.
지지향에 도착해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방에서 조금 쉬다가 심학산에서 석양을 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비빔밥으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는 탐나는 헤르만하우스 곁을 지나 산 옆구리를 타고 낙조전망대를 향해 걸었다. 구불구불. 200미터도 안 되는 야트막한 산이 숲은 제법 울창해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마치 깊은 산에 온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산은 산이었다.
살아보고 싶은, 헤르만하우스 |
해가 뜨기 전, 커튼 사이로 내다본 안개 자욱한 출판도시는 나의 환영이었을까. 해가 뜨기가 무섭게 안개로 추정되던 흐릿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산책을 나갔다. 7시가 채 안 된 시각이었지만 해가 뜬 아침은 이르다는 느낌을 주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어제, 낙조전망대에서의 석양은 조금 심심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지만 해가 넘어가는 서쪽 하늘 밑으론 말끔하지 않은 공기가 잔뜩 서려 있었고 그 사이로, 어느새 하류 끝까지 흘러온 한강을 붉게 물들이던 해는 금방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석양보다 출판도시와 한강, 그리고 저 너머 섬처럼 보이는 뭍과 뒤로 이어지는 능선들이 아련하니 보기 좋았다.
낙조전망대에서의 석양, 심학산 |
pajubookcity, 2014 |
출판도시에 도착하고, 지지향에 짐을 풀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들뜨고, 산책을 하고, 심학산에 올라 석양을 내려다 보는 모든 과정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출판도시에 머물러 보고 싶어 한 나의 희망은, 기대 이상으로 충족되었다.
아침 산책을 짧게 마치고 돌아와 두 시간 정도 더 잤다. 일어나 씻고 짐을 챙겨, 아쉽게 숙소를 나서니 12시가 다 되었고, 못 와본 사이 북카페(행간과여백)로 탈바꿈한 돌베개에 들러 두 권의 책을 샀다. 그러고 나서 어제 없어서 못 산 빵을 먹으러 따순기미에 가 팥빵과 튀김소보로, 수제버거와 고르곤졸라빵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배가 불렀다.
계획보다 지연된 시간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피곤했기에 헤이리에 가고자 한 계획은 전면 취소하고 미메시스에 들러 알베르토 아후벨의 전시를 관람했다. 포르투갈의 건축가 알바루 시자가 디자인한 미메시스뮤지엄은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유려한 곡선으로 마감된 우아한 건축물이다. 제대로(?) 사진으로 담아보고자 애를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거대한 관람공간을 누비며 전시에 집중하기보다 건축물의 선線에 주목한 나는 곳곳에 난 창으로 스미는 빛과 함께 그러한 선들이 빚어내는 내부의 풍경을 담아내느라 분주했다.
지금은 미술관 로비에 있는 카페에 앉아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둘 다 몹시 졸려하고 있다. 이대로 더 이상의 일정 없이 서울로 돌아가야겠다.
2014년 6월 6일에서 7일까지, 게스트하우스 지지향과 미메시스뮤지엄
2014/06/25
아침을 먹고 정릉(貞陵)에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교수단지를 지나는데 주차되어 있는 카니발에 라이트가 켜져 있었다. 그래서 자동차 앞유리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로 메시지를 넣었더니 금방 '고맙다'고 메시지가 왔다. 그러고선 흥천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몇 해 전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의 작은 자동차를 타고 지리산에 가는 길이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중산리에서 올라 천왕봉만 다녀오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오르기 위해 중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해에 있는 바닷가에 민박을 잡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옆방에 엠티를 온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가 몹시 떠드는 바람에 우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중에 떠나기로 했다. 조금 일찍 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눈을 붙이다가 등산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출발한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자동차 라이트가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지방이고 밤중이라 지나가는 자동차도 거의 없었고 공교롭게도 새로 포장을 하고 있는 임시 도로여서 가로등이 아직 설치되어 있지 않아 라이트가 나가버리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가까스로 길가에 차를 세우고 긴급출동을 불렀다. 긴급출동을 기다리며 우리는 캄캄한 지방의 소도시 길가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웃으며 얘길 나누고 있었다. 20분쯤 지났을까. 렉카차 한 대가 도착해서는 불을 비추고 차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으나 라이트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렉카차를 돌려보내고 차를 세운 자리에서 해가 뜰 때까지 자기로 하고는 자동차 시트를 뒤로 젖혔다. 이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우습지만은 않았다. 어느새 날이 밝고, 다시 중산리로 차를 몰았다. 둘 다 피곤했지만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부산으로 향했다. 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KTX를 타기 위함이었고 울산이 고향인 친구는 집에 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부산으로 가는 운전은 내가 하기로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고속도로는 조금 혼잡했다.
부산역에 도착해 한쪽에 차를 세우고 역전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가 저녁을 먹고 헤어졌는데 막 열차에 올랐을 때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니 왜 미등 켜놓고 갔노?"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고 울산에 가야 하는 친구는 이번엔 배터리가 방전이 돼 시동이 걸리지 않는 바람에 긴급출동을 또 불러야 했다. 친구는 피곤하기도 하고 이미 어두워진 탓에 부산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울산에 갔고, 그제서야 정비소에 들러 라이트를 고칠 수 있었다.
친구의 작은 자동차를 타고 지리산에 가는 길이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중산리에서 올라 천왕봉만 다녀오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오르기 위해 중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해에 있는 바닷가에 민박을 잡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옆방에 엠티를 온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가 몹시 떠드는 바람에 우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중에 떠나기로 했다. 조금 일찍 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눈을 붙이다가 등산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출발한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자동차 라이트가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지방이고 밤중이라 지나가는 자동차도 거의 없었고 공교롭게도 새로 포장을 하고 있는 임시 도로여서 가로등이 아직 설치되어 있지 않아 라이트가 나가버리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가까스로 길가에 차를 세우고 긴급출동을 불렀다. 긴급출동을 기다리며 우리는 캄캄한 지방의 소도시 길가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웃으며 얘길 나누고 있었다. 20분쯤 지났을까. 렉카차 한 대가 도착해서는 불을 비추고 차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았으나 라이트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렉카차를 돌려보내고 차를 세운 자리에서 해가 뜰 때까지 자기로 하고는 자동차 시트를 뒤로 젖혔다. 이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우습지만은 않았다. 어느새 날이 밝고, 다시 중산리로 차를 몰았다. 둘 다 피곤했지만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부산으로 향했다. 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KTX를 타기 위함이었고 울산이 고향인 친구는 집에 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부산으로 가는 운전은 내가 하기로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고속도로는 조금 혼잡했다.
부산역에 도착해 한쪽에 차를 세우고 역전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가 저녁을 먹고 헤어졌는데 막 열차에 올랐을 때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니 왜 미등 켜놓고 갔노?"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고 울산에 가야 하는 친구는 이번엔 배터리가 방전이 돼 시동이 걸리지 않는 바람에 긴급출동을 또 불러야 했다. 친구는 피곤하기도 하고 이미 어두워진 탓에 부산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울산에 갔고, 그제서야 정비소에 들러 라이트를 고칠 수 있었다.
2014/06/18
돈암에 산다
동네를 기록하기 위해 필요하거나 준비해야 할 건 따로 있지 않다. 그저 무엇을 적을까에 대한 선택의 문제만 남을 뿐.
이 동네에 산 지 벌써 햇수로 7년째. 근처 정릉에 산 시절을 포함하면 나의 서울생활 12년 중 대부분을 이 근방에서 산 셈이다. 그리고 지나온 시절만큼 나는 이 동네에 적응하게 되었고 딱 그만큼, 늘지도 줄지도 않은 애정을 갖고 있다. 그 말은 ‘익숙함'이란 말로 대신해도 무방할 것이다.
돈암이란 지역이 내게 익숙함으로 다가온 건 어쩌면 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이모 가족,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의 언니 가족이 돈암에 오래 거주하셨다고 했다. 마당이 딸린 한옥에서 오래 사셨다고 했는데 사업의 실패였나, 어떤 이유로 집과 가지고 계시던 건물을 몽땅 팔고는 지금의 녹번동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 집이 참 좋았는데, 하시면서 아버지는 꽤 자주 아쉽다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었다. 아버지의 기억은 한참 젊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공부를 곧잘 했던 삼촌들이 서울에서 학교 생활을 할 때 그 집에 거주를 했었는데 맏형인 아버지께서 종종 서울에 와 삼촌들 뒷바라지를 하시곤 했다.
누나와 함께 정릉에 살다가 내가 의정부로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좀 더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옮기고자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누나도 영등포 부근에 있는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여서 전철이 가까운 곳이 둘 모두에게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다가 누나가 결혼을 하면서 전세였던 집을 떠나 바로 옆동의 아파트를 구매해 이사를 했고, 매형이 지방에서 근무할 때라 굳이 집을 나갈 필요없이 나 또한 그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벌써 4년이나 지나버렸다. 그리고 조카가 둘이나 생길 동안 나는 그대로, 지금의 집에, 동네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는 직장도 수원으로 다니고 있으면서, 벌써 4년에 가까운 동안, 직장 부근으로 독립을 하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이 질문을 나는 꽤나 오랫동안 받아왔다. 나를 아는 누구나, 이 점을 몹시도 궁금해 했고, 눈치없는 녀석이라느니, 괜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느니,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수식처럼 붙어다녔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까?
이 동네에 산 지 벌써 햇수로 7년째. 근처 정릉에 산 시절을 포함하면 나의 서울생활 12년 중 대부분을 이 근방에서 산 셈이다. 그리고 지나온 시절만큼 나는 이 동네에 적응하게 되었고 딱 그만큼, 늘지도 줄지도 않은 애정을 갖고 있다. 그 말은 ‘익숙함'이란 말로 대신해도 무방할 것이다.
돈암이란 지역이 내게 익숙함으로 다가온 건 어쩌면 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이모 가족,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의 언니 가족이 돈암에 오래 거주하셨다고 했다. 마당이 딸린 한옥에서 오래 사셨다고 했는데 사업의 실패였나, 어떤 이유로 집과 가지고 계시던 건물을 몽땅 팔고는 지금의 녹번동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 집이 참 좋았는데, 하시면서 아버지는 꽤 자주 아쉽다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었다. 아버지의 기억은 한참 젊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공부를 곧잘 했던 삼촌들이 서울에서 학교 생활을 할 때 그 집에 거주를 했었는데 맏형인 아버지께서 종종 서울에 와 삼촌들 뒷바라지를 하시곤 했다.
누나와 함께 정릉에 살다가 내가 의정부로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좀 더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옮기고자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누나도 영등포 부근에 있는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여서 전철이 가까운 곳이 둘 모두에게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다가 누나가 결혼을 하면서 전세였던 집을 떠나 바로 옆동의 아파트를 구매해 이사를 했고, 매형이 지방에서 근무할 때라 굳이 집을 나갈 필요없이 나 또한 그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벌써 4년이나 지나버렸다. 그리고 조카가 둘이나 생길 동안 나는 그대로, 지금의 집에, 동네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는 직장도 수원으로 다니고 있으면서, 벌써 4년에 가까운 동안, 직장 부근으로 독립을 하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이 질문을 나는 꽤나 오랫동안 받아왔다. 나를 아는 누구나, 이 점을 몹시도 궁금해 했고, 눈치없는 녀석이라느니, 괜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느니,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수식처럼 붙어다녔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까?
지금의 내 방에서 보이는, 서울 |
2014/06/08
뜻하지 않게, 바라데로
바라데로는 계획에 없던 곳이었다.
마탄사스에서의 새 아침이 밝았고,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새벽에 날이 밝으면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로사 마리아(숙소 주인)는 마탄사스에 아주 좋은 가볼 만한 곳이 있다며 친절히 버스 번호까지 알려주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저 멀리 체 게바라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체 게바라가 선봉이 된 군대가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쿠바 혁명의 큰 변곡점이 된 그곳, 산타클라라에 이미 가 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바라데로에 가게 되었는데, 사연은 이렇다.
숙소를 나서는데 로사가 쿠바인들이 타는 로컬버스(아스트로)는 관광객이 탈 수 없다고 내게 일러주었으나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터미널에 갔고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규정이 실제로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떼를 써도 아스트로 티켓은 절대 끊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산타클라라로 가는 기차나 비아술은 밤중에나 있었고 공교롭게도 아직 오전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버스를 알아보았더니 바라데로에 가는 비아술이 얼마 후 도착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바라데로를 거쳐 산타클라라에 갈 수밖에 없었다. 관광객을 위한 버스인 비아술의 스케줄은 철저하게 마탄사스에서 바라데로를 거쳐 산타클라라로 가도록 짜여져 있었다.
그때 터미널 창구에서 생떼를 쓰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한 동양인 청년이 다가와 서툰 영어로 일러주기를, 자기는 베트남에서 공부를 하러 쿠바에 와서 3년 동안 머무르고 있는데 관광객 신분으로는 쿠바인들이 이용하는 로컬버스를 절대 이용할 수 없고 자기처럼 공부를 목적으로 비자를 발급받아 그를 증빙할 수 있는 신분증이 있으면 확인 후 티켓을 살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신분증을 보여주었는데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신분증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그에게, 대체 왜 그렇게 하는 거냐고 (물론 상대가 적절하진 않지만) 쏘아붙이듯 물어보았으나 청년의 대답은 간단했다. 쿠바는 관광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관광객들이 타도록 되어 있는 비아술에 비해 로컬버스의 값은 터무니없이 싸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가게 된 바라데로에서 도착하자마자 다음 날 아침에 있는 산타클라라행 버스표를 끊었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휴양지답게 곱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해변을 실컷 걸었고 맥주도 마시며 밥을 먹고 단지 하룻밤을 묵었을 뿐이다. 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으니 바로 석양과 쿠바 전역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환전율이다. 그 외 휴양의 도시 특성상 도시 전반에 만연해 있는 돈이 중심이 된 서비스 문화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탄사스에서의 새 아침이 밝았고,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새벽에 날이 밝으면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로사 마리아(숙소 주인)는 마탄사스에 아주 좋은 가볼 만한 곳이 있다며 친절히 버스 번호까지 알려주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저 멀리 체 게바라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체 게바라가 선봉이 된 군대가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쿠바 혁명의 큰 변곡점이 된 그곳, 산타클라라에 이미 가 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바라데로에 가게 되었는데, 사연은 이렇다.
숙소를 나서는데 로사가 쿠바인들이 타는 로컬버스(아스트로)는 관광객이 탈 수 없다고 내게 일러주었으나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터미널에 갔고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규정이 실제로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떼를 써도 아스트로 티켓은 절대 끊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산타클라라로 가는 기차나 비아술은 밤중에나 있었고 공교롭게도 아직 오전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버스를 알아보았더니 바라데로에 가는 비아술이 얼마 후 도착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바라데로를 거쳐 산타클라라에 갈 수밖에 없었다. 관광객을 위한 버스인 비아술의 스케줄은 철저하게 마탄사스에서 바라데로를 거쳐 산타클라라로 가도록 짜여져 있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베트남 청년 |
그때 터미널 창구에서 생떼를 쓰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한 동양인 청년이 다가와 서툰 영어로 일러주기를, 자기는 베트남에서 공부를 하러 쿠바에 와서 3년 동안 머무르고 있는데 관광객 신분으로는 쿠바인들이 이용하는 로컬버스를 절대 이용할 수 없고 자기처럼 공부를 목적으로 비자를 발급받아 그를 증빙할 수 있는 신분증이 있으면 확인 후 티켓을 살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신분증을 보여주었는데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신분증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그에게, 대체 왜 그렇게 하는 거냐고 (물론 상대가 적절하진 않지만) 쏘아붙이듯 물어보았으나 청년의 대답은 간단했다. 쿠바는 관광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관광객들이 타도록 되어 있는 비아술에 비해 로컬버스의 값은 터무니없이 싸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가게 된 바라데로에서 도착하자마자 다음 날 아침에 있는 산타클라라행 버스표를 끊었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휴양지답게 곱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해변을 실컷 걸었고 맥주도 마시며 밥을 먹고 단지 하룻밤을 묵었을 뿐이다. 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으니 바로 석양과 쿠바 전역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환전율이다. 그 외 휴양의 도시 특성상 도시 전반에 만연해 있는 돈이 중심이 된 서비스 문화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휴양의 도시, 바라데로의 해변 |
산책하다가 만난 |
석양은 그야말로 행운! |
Varadero, Cuba, 2007 |
바라데로의 석양을 다시 한 번 |
하얀 백사장, 흩어지는 구름, 찢어질 듯 석양, 달콤한 빵, 환상적인 환율, 끝내주는 숙소.
들쳐본 옛 노트에는 이렇게 바라데로가 남겨져 있었다.
2014.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