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갈수록 나는 베네치아라는 섬이자 도시가 그 전까지 방문한 유럽의 어떤 도시와도 기본 성질이 다르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하는 것이 이 도시 자체에 깃든 연극성이다. 베네치아라는 섬 전체가 꾸준히 성행중인 하나의 거대한 연극 공간인 셈이다. 16세기 사람인 코르나로가 베네치아에 대극장을 짓기를 꿈꾸었다면, 근대에 들어 외적 성장을 멈춘 베네치아는 스스로를 극장화하고 허구화하는 쪽을 택한 것이 아닐까. 산마르코 대성당의 눈부신 모자이크, 석양에 빛나는 석호의 잔물결, 다리 기슭에서 지저귀는 듯한 여자들의 말소리, 리알토 다리 위에서 잠잠한 물을 바라보는 젊은 남녀들, 이들 모두 세계 극장의 무대장치는 아닐까. 베네치아를 찾는 관광객은 종착역 산타루치아에 도착하자마자 이 연극에 동참하게 된다. 자신들이 도시를 구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베네치아가 그들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날 내가 베네치아의 진짜 얼굴을 찾으려 든 것은 잘못이었다. 가면이야말로 이 도시에 어울리는 진짜 얼굴인 것이다.
또하나 내가 베네치아의 허구, 즉 연극성을 느낀 일이 있다. 볼일이 있어 섬을 찾았다가 약속 시간에 맞추려 산타루치아 역 앞에서 수상버스를 탔다. 만날 사람은 산마르코 광장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상버스 대합실은 운하에 떠 있어서 사람이 탈 때마다 크게 기우뚱했다. 나는 여기서 산마르코까지 몇 분쯤 걸리는지 매표소 남자에게 물었다. 밀라노라면 적어도 몇 분쯤 걸린다는 유의 답변을 어렵잖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글쎄요, 별일 없겠지요, 하고 참으로 막역한 소리만 했다. 그 이유는 바포레토에 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자고로 배란 단단한 도로가 아니라 넘실넘실 움직이는 물위를 나아간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직접 경험해보니 충격이었다. 그 움직임을 직선 몇 미터식의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물결 가는 대로, 라는 말을 떠올리고 나는 기묘한 초조감을 느꼈다. 약속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는 내 의지가 아닌 물결이, 물이 시간을 정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이 같은 막연함에 의존하는 베네치아의 시간이, 마치 무대 위의 시간처럼, 여기서만 통용되는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205~206)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 중 먼저 읽은 것은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이었다. 우리 나라가 정전협정을 맺은 해, 작가는 파리 유학길에 오른다. 파리에서 2년 유학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가 그곳에서 결혼해 살게 되는데, 코르시아 서점의 운영자 중 한 명이 그의 남편이다. 문학동네에서 세 권의 에세이가 출간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책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지라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을 먼저 읽었고 - 몇 해 전이다 - 오랜만에 잔잔한 에세이가 읽고 싶어 꺼내든 책이 <밀라노, 안개의 풍경>.
그녀의 글은 내가 생각하는 어떤 면에서 전형적이다. 그러니까 어떤 주제를 쓰든 얼핏 사소해보이는 이야기를 슬쩍 꺼낸 다음, 긴 실타래를 풀어내는 식. 에피소드 자체로 보면 때론 극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차분하다. 안개도 닮았고 잔잔한 물결도 닮아 있다.
좀 더 쓰고 싶은데, 9년 전 다녀온 나의 베네치아 기억도 더듬어보고 싶은데,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