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6

두 개의 방

철거일이 되었을 때, 저는 이리로 올라와서 포클레인이 집들을 하나씩 부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건 꽤 현실감이 없는 일이어서, 우리집 차례가 되었을 때도 나는 그냥 멍하니 보고 있었죠. 몇 번의 타격 끝에 마침내 한 쪽 벽에 무너져내렸을 때, 액자가 보였어요. 해바라기를 그린 조악한 유화였지요. 해바라기 그림을 걸어두면 집에 돈이 굴러들어온다며 어느 날 아버지가 술에 취해 사들고 오셨던 바로 그 액자였어요. 액자 안의 해바라기가 햇볕 아래 무방비로 드러났을 때, 그 때부터 내 강박이 시작된 것 같아요. 바로 그 순간에요. 그게 거기 있었다는 걸, 나는 정말 완전히 잊고 있었거든요. 

_문진영, <두 개의 방>[2021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29-30쪽, 문학동네, 2021. 


나는 생각했다. 지금 있는 것들은 모두 무언가의 잔해 위에 있다는 생각. 어쩌면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마음의 단면을 잘라 보면 나를 통과해 간 기억과 감정의 잔해들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그 단층을 관찰하고 소환하는 과정에서, 이미 사라진 것들은 다시 '지금, 여기'의 일부로 새롭게 모양을 만들지 않을까. 

_문진영, <두 개의 방> 작가노트 중에서. 

좋다. 
문진영의 이 소설을 다 읽은 순간에 나는 존 반빌의 <바다>를 떠올렸다. 
어떤 마음의 분위기, 그것이 끌고 가는 소설의 뉘앙스. 
작가노트나 인터뷰 읽는 걸 좋아한다. 소설을 비롯한 문학 작품은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긴 하나, 속 이야기가 궁금할 때가 많다. 그랬을 때, 문학이 더 멋지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어떤 생각으로 빚어진 하나의 작은 세계를 목도하는 근사한 체험. 
아 좋다. 

2021/09/26

선큰 화단 만들기

선큰에 나무를 더 심고 싶은 계획은 진작에 있었다. 
아내가 열심히 도면을 그리고, 내가 미지근하게 반응하는 동안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올해는 넘기는 말자는 마음에 좀 더 적극적인 행동에 돌입, 
양이 적다고 인부가 안 온다고 해서 
선큰 화단을 위한 조적은 아내가 직접 쌓았다. 
2층 베란다에서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순서대로, 
0.5B → 1B마감 → 데크를 위한 추가 조적 → 마사토 반입 → 계수나무 추가 식재 






 

2021/09/01

서소문성지와 피크닉(piknic)

집에서 쉬었으면 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기차에 올랐다. 

밤새 지겹게 내리던 비는 그치고 잔뜩 흐린 날씨는 이제 가을이라고 선포하는 듯했다. 

서울역에 내려 서울로를 따라 피크닉에 갔고, 다시 서울로를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가 서소문성지에 갔다. 

아, 서소문성지. 그곳에서 내일을 위한 작은 힘을 얻었다. 

 





2021/08/31

소소한 것, 언뜻 무용해 보이는 것, 스스로에게만 흥미로운 것을 모으는 재미를 아는 사람은 삶을 훨씬 풍부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수집가만큼 즐거운 생물이 또 없고 수집가의 태도는 예술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항상 다니는 길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자신이 사는 곳을 매일 여행지처럼 경험하는 사람들이 결국 예술가가 되니까.  

_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위즈덤하우스, 2021, 95쪽.   


정세랑의 글을 읽으면 인터뷰에서 그가 말하는 어투의 발랄함이 자꾸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글이 그를 닮아 있다. 


‘그럼 진짜 여권에다 받을까?’ 하고 여권의 뒷장에 기념 도장을 받아버린 것이다. 어쩐지 찍어주는 사람이 “너희 괜찮겠니?” 하고 걱정해주더라니, 여권은 정말 중요한 공문서고 그런 훼손 행위를 해서는 결코 안 되었다… 나의 경우 별문제 없이 몇 년 후 여권 유효 기간이 끝나서 괜찮았는데, W는 2016년 마카오에서 배를 타고 홍콩으로 들어가다가 그 도장이 문제가 되어 네 시간 동안 억류되고 말았다.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 국가의 도장이 찍혀 있는지 뒷방으로 끌려가서 해명해야 했다. (같은 책, 257쪽)

 

대만에 갔을 때, 장개석 메모리얼이었던가, 에 갔다가 기념 도장을 찍을 만한 데가 없어 여권 뒷장에 무턱대고 찍었던 기억. 그리고 위구르에 갈 때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 못했던 기억. 그때 여권을 새로 발급받았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건, 그냥 여권을 새로 발급받으라고 조언해 주었던, 지금은 세상을 떠난 사촌 형의 모습.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어리석었는지. 고민되는 지점이 있으면 그냥 그 지점과 대결하면 되는 것을. 형의 쿨하고 선한 모습이 그립다. 

책을 많이 읽을 땐 책 속에서 새로운 책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듣기도 많이 들으니 팟캐스트에서도 책 정보를 많이 얻게 된다. 그 중 정세랑이 소개한 데버라 리비의 책(<살림 비용>, 플레이타임, 2021)도 아주 인상 깊었다. 


불확실하던 그 시절, 내가 불확실에 내재된 불안을,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음에서 오는 불안감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준 얼마 안 되는 활동 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서러움에서 부화한 걸지도 모를 구상이 떠오르거나 다가올 때마다, 이 착상이 내 집중된 주의력은 물론이고 분산된 주의력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수의 구상을 시간의 여러 차원에 걸쳐 펼쳐 보이는 것이 곧 글 쓰는 삶이라는 원대한 모험이다. 그런데 내겐 글을 쓸 곳이 없었다. (41쪽)


글쓰기는,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는, 표면적인 현실 이면으로 비집고 들어가라는 초대이자 눈앞에 놓인 나무만 볼 것이 아니라 나무 내부의 기반 시설 가운데 살아가는 곤충들을 보라는 초대, 모든 것이 언어와 생활이라는 생태계 안에 서로 연결돼 있음을 발견하라는 초대였고, 이것이 글쓰기가 지닌 호소력이었다. (49쪽)


하지만 말을 찾기 위해 들여야 하는 고된 노력이 언어란 살아 있는 것임을 내게 지각시키고,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란 사실 또한 상기시켰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우리는 자기 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우지만, 언어를 중단하는 것이 적당한 언어를 찾는 것 못잖게 중요한 순간들도 있다. 진실이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인 손님 중에서 반드시 가장 재밌는 손님으로 꼽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뒤라스가 암시하듯 우리에겐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항상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116쪽)


우리 모두의 사랑

성곽 산책을 자주 하진 않는다. 성곽보단 팔달산을, 산보다는 골목을 더 자주 걷는다. 동네가 변화하는 모습을 살피는 데 관심이 많아서일까. 지금 이 순간도 건물들은 헐리거나 고쳐지고 있고, 대충 디자인 된 그저그런 숍들이 생겨난다. 차들은 더 꼬이고. 성곽 산책은 이런 시선을 얼마간 거두어 준다. 성곽의 나지막한 높이와 사면이 주는 물리적 거리. 지구단위계획이 억누르고 있는 주변 건물의 높이, 그 너머로 늘 보이는 서장대. 내게 성곽 산책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화홍문을 지나 방화수류정을 스칠 때면 성곽 너머 용연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 내려가도 좋고 지나쳐도 좋다. 다만 지나친다면 걸음에 숨이 차오를 때마다 수시로 멈춰 성 밖을 둘러보는 여유를 놓쳐서는 안 된다. 



 

동네랑, 사람들이랑, 소장님이랑, 이모랑, 장난감이랑.....


오늘은 산책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사랑'을 기억하려 한다.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며 많은 걸 얻는다. 

2021/03/02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_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13쪽, 문학동네, 2021. 


작년이었나,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심채경의 이 글이 너무 좋아서 책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버스에 올라 좌석에 앉으면 우선 유리창을 단단히 가리고 있는 블라인드부터 올린다. 그러고는 가방을 열어 책을 집어든다. 요즘은 대체로 시집이나 천문학 관련 책을 읽는다. 이명현의 책을 읽은 후부터는 그렇게 됐다. 메리 올리버도 좋았고 김소연도 좋았다. 심채경의 글도 더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초승달은 해를 바짝 뒤쫓느라 초저녁에나 잠시 보였다가 이내 지평선 아래로 가버린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달은 차오르고, 뜨고 지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진다. 오후에 반달이 보인다면 해와 한참 떨어진 동남쪽이다. 오른손 방향으로 볼록한 상현달이다. 보름이면 서쪽으로 해가 질 무렵에야 동쪽에 달이 떠오른다. 보름달은 해가 없는 동안 내내 밤을 지키다 해 뜰 무렵 서쪽으로 진다.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은 매일 대략 50분씩 늦어진다. 보름에서 며칠이 지나 이제 한쪽만 볼록한 하현달은 한밤중에야 잠깐 떴다가 낮에 진다. 오전에 서쪽에 뜬 반달이 하현달이다. 며칠이 더 지나 그믐달 무렵이 되면, 새벽녘에야 달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고는 곧 해가 올라오니 낮 동안 보이지 않는다. 초승달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상현달과 보름달도 꽤나 사랑받는다. 그러나 밤하늘에 하현달이 보이는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 그믐달은 밤을 꼴딱 샌 사람들, 혹은 한밤중에 일어나 태양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소수의 사람들만 보는 그런 달이다. 

_같은 책 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