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16

나는 인생이, 세계가 악몽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탈출할 수 없고 그저 꿈만 꾸는 거죠.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어요. 구원은 우리에게서 차단되어 있지요.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나의 구원은 글을 쓰는 데 있다고, 꽤나 가망 없는 방식이지만 글쓰기에 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계속해서 꿈을 꾸고, 글을 쓰고, 그 글들을 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셨던 충고와 달리 무모하게 출판하는 일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게 내 운명인 걸요. 내 운명은 모든 것이, 모든 경험이 아름다움을 빚어낼 목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실패했고, 실패할 것을 알지만, 그것이 내 삶을 정당화할 유일한 행위니까요. 끊임없이 경험하고 행복하고 슬퍼하고 당황하고 어리둥절하는 수밖에요. 나는 늘 이런저런 일들에 어리둥절해하고, 그러고 나서는 그 경험으로부터 시를 지으려고 노력한답니다. 많은 경험 가운데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답니다. 나는 새 책을 적게 읽고,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건 많이 하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군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말> 152~153쪽, 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2015

인터뷰 같은 기록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알게 되는 건 흥미롭다. 더군다나 그가 보르헤스 같은 작가라면 더욱. 읽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책을 덮으니 마치 그의 단편집을 읽은 것처럼 꿈 속을 유랑하다 막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느끼는 것. 그 느낌의 얼개를 기억하는 것. 그래서 그 느낌으로 얼추 충만의 기분을 갖는 것. 이런 일련의 과정이 보르헤스를 읽는 기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