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7

프롤로그

여행을 목적으로 쿠바에 입국하는 외국인은 30일간 쿠바에 머무를 수 있다. 캐나다인들은 기본이 90일이고 보통의 외국인들은 30일을 머무르고 더 머무르고자 한다면 여정이 거의 끝나가는 즈음에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연장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르고 관타나모에서 한 달을 연장하고자 출입국사무소에 들른 나는 통하지 않는 말 대신 달력으로 설명을 들어야 했다. 내 체류기간이 만료되는 날보다 2~3일 앞의 날짜를 가리키며 이때 다시 오라고, 그곳에 있는 직원은 손짓으로 내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아바나에서 시작해 다시 아바나로 돌아온 나는 여정을 연장할 생각을 지배적으로 하고 있었고, 출입국사무소에 가기 전 서울에 있는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는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쿠바에 머무르는 한 달 동안 아바나에 도착한 날 집에 전화를 한 번 하고 더는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급하지 않은 성격과는 다르게 전화를 받은 누나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여비도 남았고, 한 달 정도 더 머물러도 좋겠다고 생각한 내 마음은 말레콘의 파도에 부서져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볕이 좋은 날이면 그렇게 부서지는 바다 부스러기에 무지개가 피어난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오로지 부서져 사라지기만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내년이면 처음 해외 여행을 시작한 지 꼭 10년이다. 그리고 2007년에 떠났던 쿠바 여행은 지난 내 모든 여행의 정점에 있다. 적어도 쿠바 여행기를 쓰고자 하는 지금의 내겐 그렇다.
여행수첩을 찾아 내어놓고 책장에서 론리플래닛을 빼올린다. 한 달, 쿠바의 습기로 눅눅해진 론리플래닛은 페이지마다 그곳이 가득하다. 색이 바랜 손때에선 여전히 그곳 냄새가 나고 구겨진 추억들은 자신은 여전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제와 쿠바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건 그 어떤 이유도 아닌 그저 더 잊어버리기 전에 좀 더 체계적인 기억으로 복원하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수첩을 뒤적이고 사진을 하나 하나 들여다보면 지금의 내 일상이 더욱 비참해질 테지만 이런 과정이 나를 조금은 더 살아있게 할 것이다. 적어도 그런 기분에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기억이란 속성이 으레 그렇듯 좋았던 기억은 그것에 그간 쌓인 환상이 더해져 더욱 아름답게 꾸며질 것이고 그렇지 않은 기억은 끝끝내 부정되어 축소, 왜곡하려 들 것이다. 뭐든 좋다. 2014년 2월, 지긋지긋한 서울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외롭고 고독한 나는 조금이라도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어깨를 들이밀고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2014. 2. 16.